▲<소요산> 스틸. 낙검자 수용소 (몽키하우스) 전경.
김진아
공간에 새겨진 통곡과 절규를 듣다
<소요산> 영상의 첫 장면은 소요산을 배경으로 흉물스럽게 서 있는 낡은 건물의 외경이다. 건물에 얽힌 히스토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오래된 건축물에 불과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벌어진 야만의 시간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선뜻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 복잡한 마음으로 건물을 쳐다보고 있으니 잠시 후 건물 안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한낮인데도 빛이 잘 들지 않는 내부는 어두컴컴하다. 처음 도착한 장소는 공동 침실이다. 군대의 내무반과 비슷한 구조의 침상 위로 베개들이 빼곡하게 일렬로 놓여있다. 그 중 한 자리에만 검은 담요가 펼쳐져 있다. 마치 방금 누군가 잠에서 깨어 방을 나간 듯한 모습이다. 다음 장소는 공동 샤워장과 세면대, 문이 없는 화장실이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세면대엔 누군가 사용한 듯한 칫솔과 세면 도구가 나타난다.
방금 전 침실에서 나와 세수를 마친 누군가의 동선을 따라가듯 다음 장소는 식당으로 전환된다. 빈 공간에서 재현되는 식당 이미지는 테이블과 의자, 1인분의 식사가 담긴 식판 등이다. 평범한 일상처럼 흐르던 누군가의 시간은 산부인과 진료 의자와 피 묻은 기기들이 재현된 치료실에서 전복된다. 이곳에 감금된 누구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요산> 스틸. 낙검자수용소 공동침실.
김진아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들은 피해 여성들의 증언과 현장에서 발견된 하루 일과표를 토대로 재구성된 것이다. 김진아 감독은 이곳에 남겨진 역사를 '공포와 수치'라고 표현한다. 국가 권력에 의해 훼손된 여성들의 통곡과 절규, 공포와 두려움이 수용소의 구조와 잔해들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어둠이 내린 복도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관객은 빗소리 사이로 흐느끼는 여성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녀의 울음은 처음엔 작은 흐느낌이었다가 차츰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커다란 통곡으로 바뀐다.
감독은 오래 전 누군가의 아픔을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한다. 이 공간을 살다 간 그녀들의 시간이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도 흐르고 있음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도록 안내한다. 포스터 속 여성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긴 담배 연기는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는 외로운 생의 끝자락에서 스스로에게 보내는 그녀의 마지막 숨이다. 천천히 옥상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더욱 처연하게 만드는 것은 함부로 찢겨진 그녀의 치맛자락이다. 같은 공간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관객은 몽키 하우스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된다.
▲<소요산> 스틸 이미지.
김진아
김진아 감독은 <소요산>의 제작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소요산>이 몽키 하우스라는 공간을 기록 및 보존하는 동시에, 한미 양국의 사이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김진아 감독 제작노트 중에서)
VR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재현한 공간 속에서 관객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탐색하고, 공감하는 스토리두잉 콘텐츠다. 감독은 관객과의 일대일 소통을 통해 동시대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건과 현장, 흔적과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관객들이 동일한 경험과 느낌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가상현실 속에서 마주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기억의 윤리에 대해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김진아 감독의 <소요산>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환기이자 공권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촉구하는 콘텐츠 액티비즘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50년 전 국가가 가둬둔 여성들의 하루, 통곡소리가 들린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밴드
- e메일
-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