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고픈' 거스 히딩크 감독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퀴라소 축구대표팀이 2022 카타르 월드컵 북중미 1차 예선 C조에서 쾌조의 2연승을 내달리며 순항중이다. 퀴라소는 1차전에서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 5-0으로 대파한데 이어 2차전에서는 쿠바를 2-1로 제압하며 조 선두에 올랐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퀴라소는 히딩크 감독의 모국이기도 한 네덜란드의 구성국이자 자치령이다. 과거에는 안틸레스 제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네덜란드의 일부지만 지역적으로는 카리브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FIFA(국제축구연맹)에는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CONCACAF)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인구는 16만에 불과하지만 본토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를 비롯하여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서 북중미 축구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다크호스로 꼽힌다. 국제축구연맹 피파랭킹도 76위(2021년 2월 기준)로 의외로 높은 편이다.
한국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던 퀴라소가 최근 들어 국내에서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한국 팬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축구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은 19년의 세월의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한국축구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히딩크 감독은 축구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세계적인 명장 중 한 명이다. 월드컵에서는 1998년 프랑스 대회 때 네덜란드를, 2002년 한일대회 때 한국을 각각 4강에 올렸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호주를 32년 만의 본선진출과 16강에 올려놓았다.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08)에서는 러시아를 4강으로 이끌기도 했다.
클럽팀에서도 네덜란드 명문 PSV 아인트호벤의 1998년 트레블(3관왕)과 2005년 UCL 4강 진출, 잉글랜드 첼시의 2009년 FA컵 우승 등을 견인하며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한국축구와도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며 대표팀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박지성과 이영표를 직접 유럽까지 데려가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물꼬를 열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히딩크 감독의 경력도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러시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2010년 남아공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하며 사임한 것을 시작으로 터키 대표팀, 네덜란드 대표팀 2기 등을 맡았지만 잇단 성적 부진으로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낙마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는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직 복귀설이 나오기도 하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국내에서 히딩크 감독의 인기가 높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히딩크 감독은 2019년에는 중국 23세 이하(U-23) 올림픽팀 감독을 맡았다가 무리한 성적을 요구하는 중국축구협와 갈등을 빚으며 AFC U-23 챔피언십을 불과 4개월 앞두고 경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만일 히딩크 감독이 중국의 지휘봉을 유지했더라면 조별리그에서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과 올림픽 티켓을 놓고 맞대결할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히딩크 감독을 내친 중국은 예상대로 예선탈락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고, 김학범호는 전승으로 순조롭게 도쿄올림픽 티켓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많은 이들은 히딩크 감독이 조금씩 현대축구의 흐름에서 뒤떨어져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축구계 주류에서는 이미 밀려난 데다 나이도 어느덧 일흔을 넘긴 고령에 접어들며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히딩크 감독은 2020년 8월 퀴라소 축구대표팀의 사령탑 겸 기술위원장을 겸직하는 조건으로 다시금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약기간은 2022년까지로 카타르월드컵 본선 진출이 히딩크 감독에게 주어진 목표다.
퀴라소는 안틸레스 제도 시절인 1958년부터 꾸준히 월드컵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으나 본선진출 경험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북중미 대륙선수권인 골드컵에는 총 23회 출전하여 3위를 두 차례 기록한 것이 최고 성적이지만 당시는 출전국이 4~6개국밖에 되지 않던 1960년대의 이야기다. 1970년대 이후로는 줄줄이 예선 탈락의 아픔을 피하지 못하는 등 철저히 축구 변방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퀴라소 축구협회는 히딩크 감독의 풍부한 경험을 활용하여 장기적으로 대표팀의 경쟁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냉정히 말하면 퀴라소는 히딩크 감독의 지도자 커리어에서 중국 U-23팀과 함께 가장 약체로 꼽힐 만한 팀이다. 지도자로서 영욕을 모두 맛본 히딩크 감독이 사실 고령의 나이에 다시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을 사서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축구인생을 성공으로 이끈 것도 바로 그러한 도전과 모험정신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과거에 맡았던 한국이나 호주, 러시아 등은 우승트로피 수집보다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높고 확실한 동기부여와 지원이 보장된 '언더독'에 가까웠고, 히딩크 감독은 약팀을 강팀으로 육성하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히딩크 감독은 휘하에서 퀴라소는 벌써 2경기 만에 FIFA 주관대회 역대 최다승 타이기록을 수립했다. 퀴라소의 최고성적은 2014 브라질월드컵 북중미카리브 예선에서 2승(1무 3패)을 거둔 것이었다. 카타르월드컵 북중미카리브 예선은 원래 지난해 10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올해로 3월로 연기됐다. 히딩크 감독은 코로나19 때문에 평가전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월드컵 예선을 통해 퀴라소의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나 악조건을 극복하며 연승을 지휘했다.
히딩크의 퀴라소가 1차 예선을 통과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6개 조로 나눠 진행하는 북주미 1차 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6개 팀이 2차 예선에 나설 수 있으며 퀴라소가 속한 C조 1위는 D조 1위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대결하게 된다. 2차 예선 승자 3개 팀은 3차 예선에 직행한 5개국과 합쳐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풀 리그를 펼쳐 3차 예선 상위 3개 팀은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고, 4위 팀은 대륙 간 플레이오프에 나서게 된다.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 경험이 없는 퀴라소에 본선은 아직 먼 길이지만, 히딩크 감독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한발씩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히딩크 감독은 최근 애제자 박지성과 이영표가 함께 출연중인 MBC 예능 <쓰리박>에도 특별 인터뷰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오랜만에 반가운 근황을 공개하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은 "지도했던 한국 선수 중 가장 먼저 유럽으로 데려가고싶었던 선수가 누구였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홍명보, 유상철, 이을용, 이영표 등 애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론하며 "마음같아선 모두 다 데려가고 싶었다. 월드컵을 통해 모두가 함께 높은 수준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는 우문현답으로 대처했다.
박지성이 예능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TV에서 노래는 부르지 말라. 목소리가 별로다"라며 애정어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어느덧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정정한 모습과 녹슬지 않은 유머감각, 한국축구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는 히딩크 감독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2002 한일월드컵 3, 4위전에서 터키를 이끌고 히딩크 감독과 경쟁하며 FC서울 감독을 지내기도 했던 명장 세뇰 귀네슈 감독도 최근 다시 자국 터키 대표팀 감독을 맡아 선전을 이어가며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2002년을 빛냈던 추억의 명장들이 아직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건재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모습은 축구팬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반가운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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