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4장의 정규 앨범 중 음악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꼽힌다.
스포트라이트
댄스가수로 화려하게 변신을 했지만 서태지의 음악적 뿌리는 역시 하드록이었다. 이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3집을 통해 또 한 번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재킷에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낯설어 했고 3집은 그들이 발표한 4장의 정규앨범 가운데 가장 적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3집은 훗날 많은 팬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서태지는 1,2집에도 <환상 속의 그대>나 <죽음의 늪> 같은 사회 비판적인 노래들을 많이 담았지만, 3집부터는 가사 속에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는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곡이다. 이 노래는 지난 2002년 고등학교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199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로 수록되며 그 가치를 인정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발해를 꿈꾸며>로 활동하면서 대형 태극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의 타이틀곡은 <발해를 꿈꾸며>였지만 당시 청소년들이 가장 열광하던 노래는 따로 있었다. 바로 교육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교실이데아>였다. 메탈 밴드 크래시가 피처링에 참여한 <교실이데아>는 시커먼 교실에서만 아까운 젊음을 보내던 청소년들의 꽉 막힌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노래였다.
하지만 <교실이데아>는 노래의 인기와는 별개로 괜한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다. 바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태지의 사탄 숭배설'이었다. <교실이데아>의 테이프를 거꾸로 재생하면 '피가 모자라'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테이프 거꾸로 듣기를 시도하다가 테이프를 망가뜨린 학생들이 다수 발생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을 재구매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인간이 가진 이중성과 약물 중독의 위험을 다룬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변화무쌍한 곡전개가 인상적인 노래다. 특히 노래 중간에 지킬박사가 하이드로 변신해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묘사되는 가사가 있는데 놀랍게도 심의를 통과했다. 참고로 1년 후에 발표한 4집에서는 <필승>의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 거야'나 <시대유감>의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같은 비유적인 가사들조차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3집에도 두 곡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실었다. 세상을 떠난 연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영원>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서태지의 미성이 조화를 이룬 곡이다.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에 열었던 솔로 라이브 공연에서도 실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영원>을 부르며 노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은 엔터테인먼트업계의 거물이 된 양현석이 가사를 쓴 <널 지우려 해>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팀의 색깔을 유지했다면 단연 타이틀곡 1순위가 됐을 노래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1, 2집에 이어 1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상업적으로 그리 성공한 앨범은 아니었다. 특히 서태지가 록음악으로 회귀하면서 '아이들'의 비중이 더욱 작아진 앨범이었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서태지의 음악적 행보와 향후 솔로 활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됐던 앨범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중들 기억 속에 영원할 '우리들만의 추억'
▲서태지는 2014년 지상파 TV토크쇼에 출연하며 팬들에게 반가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
KBS 화면 캡처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4집 <컴백홈>과 <필승>을 통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후 1996년 1월 눈물의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선택했다.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는 이미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지만 사전정보가 전혀 없던 대중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서태지는 2년 후 6곡이 수록된 솔로 앨범을 발표했고 2000년에는 <울트라맨이야>와 <인터넷 전쟁>, <ㄱ나니> 등이 수록된 앨범을 들고 다시 대중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당시 5년 만에 귀국한 서태지를 보기 위해 김포공항(당시엔 인천공항이 개항하지 않았다)에는 3000명이 넘는 많은 팬들이 운집했고 시크한 단발머리로 나타난 서태지는 엷은 미소로 55개월을 기다려 준 팬들과 인사했다.
이후에도 서태지의 행보는 팬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장의 정규앨범과 3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던 서태지는 솔로 데뷔 후에도 정규 앨범 5장만 선보였을 정도로 활동이 뜸하다. 개인적으로도 비밀결혼과 이혼, 그리고 지나친 은둔생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서태지가 가요계에 미친 파급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비주류였던 댄스음악과 음반 구매층의 변방이었던 10대들을 가요계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 게다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심의제도를 폐지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면서 동료 뮤지션들이 제약 없이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이는 서태지가 영원한 '문화대통령'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녀들의 영원한 오빠, 청소년들의 영원한 문화 대통령일 줄 알았던 서태지도 어느덧 한국 나이로 50세가 됐고 올해 드디어 귀여운 딸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형'이 된다. 서태지가 간간이 발표하는 음악 역시 이제는 예전처럼 모든 대중들이 한마음으로 열광하진 않는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우리들만의 추억'을 선물해준 고마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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