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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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철종 6년 4월 18일자(양력 1855년 6월 2일자) <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은 "내가 이 사람의 일에 관해 말하고 싶은 지가 오래됐다"면서 홍인한을 복권시키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홍인한이 오해를 샀으며, "정조께서도 그 원통한 실상을 일찍이 훤히 알고 계셨"다며 홍인한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키라는 왕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 왕명은 반발에 부딪혔다. <철종실록>은 엘리트들이 주로 진출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나서서 왕명을 거둘 것을 촉구했다고 알려준다.
이로 인해 철종은 물러섰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음력으로 그해 12월 15일자(양력 1866년 1월 22일자) <철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동일한 왕명을 다시 꺼내들어 반발을 자초했다.
철종은 매우 집요했다. 철종 9년 10월 25일자(1858년 11월 30일자) <철종실록>에도 그의 동일한 왕명이 등장한다. 홍인한을 사면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이때도 사면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신하들의 반발이 이 시기의 실록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3년 만에 사면론이 관철된 것이다.
철종은 홍인한을 사면해주는 것이 같은 집안인 혜경궁 홍씨와 그 아들인 정조의 명예를 살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조가 홍인한을 적대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으므로 철종의 논리는 힘을 갖기 힘들었다.
철종의 사면론은 정치적 실리도 명확히 담보되지 않는 것이었다. 시파의 세상이 된 뒤였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몰락한 벽파가 되살아나서 후원 세력이 되어주지 않는 한 그랬다.
시파인 안동 김씨의 후원으로 임금이 된 그가 그런 고집을 부린 이유에 관해 2012년에 <한국사 학보> 제49호에 실린 역사학자 임혜련의 논문 '철종대 정국과 권력집중 양상'은 "철종은 선대왕을 존숭하고 효를 다하면서 그 과정에서 정통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치력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면서 이 사건을 '철종의 셀프 정치력 시험'으로 해석한다.
"선대왕들에 대한 존숭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판단하여, 정조의 의리를 따르던 시파였던 안동 김문에 대한 정치적 시험으로 볼 수 있다"고 논문은 말한다. 안동 김씨와 협력하면서도 독자 영역을 넓혀볼 목적으로 그런 논의를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인한 사면은 철종의 입지를 확대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같은 정치적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은 좀 과장되기는 하지만 철종을 안동 김씨의 허수아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철종의 사면론이 그의 정치적 목표를 성취시켜주지 못한 것은 그것이 안동 김씨의 의지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대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개혁 의지를 꺾고자 했으며 개혁군주 정조에 의해 비토를 받은 홍인한을 사면해주자는 그의 주장은 시대 흐름에 명백히 뒤처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철종 자신에게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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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