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희정당 내부
김종성
궁궐 의료 감독자인 내의원 도제조를 겸한 그는 이날 궁궐 약국인 약원(藥院)을 거쳐 희정당으로 갔다. 일기장인 <경산일록>에서 그는 "약원에 갔다가 입시했다"며 "협의하여 공진군자탕(拱辰君子湯)을 올렸다"고 말했다.
2007년에 <의사학> 제16권 제2호에 실린 김정선·황상익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내의원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의학 경향'은 "철종이 주로 복용한 보약은 음양을 같이 보(補)하는 공진군자탕·귀용군자탕·경옥고 등이었다"며 음기와 양기를 함께 북돋아준다는 공진군자탕을 고종 임금은 봄과 겨울에 복용했다고 말한다. 정원용이 철종에게 공진군자탕을 들고 간 이때도 양력 3월이었다.
그런데 공진군자탕보다 철종의 관심을 더 끈 게 따로 있었다. 정원용은 임금이 음양의 기운을 보충하는 일에 신경을 썼지만, 철종의 고민은 삼정이 문란해져 나라 경제가 위태롭게 된 데 있었다. 위 <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은 정원용에게 이렇게 말했다.
"근일에 팔로(八路, 팔도)가 거꾸로 매달린 형세라서 참으로 매우 가파르게 위태롭습니다. 내 비록 구중궁궐에 깊숙이 거처하고 있지만, 아무개 방백(관찰사)과 아무개 수령 중에 누가 청렴하고 누가 탐욕스러운지, 누가 깨끗하고 누가 시커먼지에 관해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없지 않습니다."
지방관들의 부정부패에 대해 자신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힘 있는 군주였다면, 중앙 대신이나 세도가문들의 비리도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것이다. 힘없는 군주인 그는 세도가문들과 이리저리 얽혀 있는 지방관들을 지목하면서, 그들로 인해 조선 팔도의 형세가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앙정부 차원의 대책 수립을 촉구하면서 이날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내가 옛날 명철한 왕들에는 못 미쳐도, 팔로 방백과 수령의 선악 및 청렴·부정에 관해서는 자연히 갖가지 들리는 바가 있어 침실 벽에 써두고 눈을 항상 그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곳 희정당은 아니지만 내 침실에 가면 부정부패 공직자들의 이름과 죄상이 벽면에 적혀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뒤에 이 내용을 각 지방에 알리라고 정원용에게 명령했다.
9일 뒤인 음력 3월 5일(양력 4월 7일)에도 철종은 '침실 벽'을 거론하며 대신들을 다그쳤다. 침실 벽에 다 써놓았다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왜 진전이 없는 거냐며 재촉했다. 그 정도로, 백성을 살리고 민생 경제를 복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철종실록> 여러 곳에서 삼정의 문란과 백성들의 고충을 염려하는 철종의 마음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정은 철종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진군자탕을 들고 간 정원용도 그날 일기장에 공진군자탕을 바친 일과 더불어 철종이 민생 문제를 언급한 사실을 간략히 적었을 뿐이다. 그리고 철종이 가장 강조한 대목인 '침실 벽'은 일기장에 언급조차 돼 있지 않다. 안동 김씨와 연결된 정원용의 입장에서는, 철종이 국정에 개입하기보다는 건강을 잘 지켜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다.
철종의 애민 정책에는 한계가 있었다. <철인왕후>의 철종은 가슴속에 비수를 숨기고 안동 김씨 가문을 대하지만, 실제의 철종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동 김씨와 상당히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그로 인한 민생경제 파탄에 대해 철종 역시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철종은 세도정치에 불만을 품으며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힘이 없어 성공하지 못하고 허약한 임금으로 역사에 남기는 했지만, 그는 사도세자의 혈통을 이은 마지막 군주답게 행동했다. 제한적으로나마, 기득권을 누르고 백성의 편에 서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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