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광주문화방송
정율성 그는 지금 영광스런 혁명열사릉에 잠들어 있지만 혁명가로서 그는 평탄치 않았다. 어느 시기, 체제에서도 외로운 외지인이었다. 연안의 소수자 조선인으로 노골적인 차별과 편견, 일본 특무 혐의에 시달렸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동포 운동가 '김산'과의 친분도 삼가야 할 만큼 불안한 처지였다.
그러나 비밀처형장으로 향하는 김산의 마지막 십리 길을 그는 배웅했다. 부당한 위협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우직함. 그것은 전 가족을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고 세속적으로 가문이 멸망에 이르게 한 불행한 유전자였다.
자신이 믿고 선택한 체제의 조직으로부터 받는 오해는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연안의 무분별한 정풍운동과 혁명정부수립 후의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그의 예술 활동에 커다란 공백기를 남겼다. 어느 조직에나 존재하는 일부 좀벌레 같은 세력들의 사악한 음해와 공작은 인민을 위해 이바지하고자 하는 그의 진정성에 회의를 안기곤 했다.
적대적 환경에 맞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음악작업에 더욱 매진하는 것이었다. 끌어 오르는 억울함과 울분을 음표와 기호로 풀었다. 노선과 계파, 파벌 간 갈등으로 심화된 엇박자와 불협화음을 타개하길 바라는 그의 바람이 오선지 안의 길고 짧고 높고 낮은 박자와 음정 쉼표와 마침표로 화음을 이루어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마냥 우호적이고 편안한 환경에서 제작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안 구성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으로 치러야 했던 비판과 비난의 심판대에 오로지 작품으로 소명했다. 음악은 그가 지닌 유일한 무기이자 구원이었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천재 음악가 정율성의 생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의 작품 몇 곡을 감상해 볼 것을 권한다. 동영상 플랫폼에서 그의 대표곡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국말에 서툰 것은 그의 음악을 감상하는데 지장이 되지 않는다. 낯선 중국어 가수의 열창 속에 그 옛날 연안의 토굴 요동 안에서 조선인 청년 정율성이 음악 부호를 매개로 21세기 대한민국 동포의 가슴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나는 민중을 위해 쓴다. 그들의 단순한 두 눈 내 시를 비록 읽지 못할지라도 내 삶을 흔들었던 곡조, 한 줄의 시구 그들 귓가에 닿을 날 있으리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중국어 노랫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조국 잃은 청년의 울분과 외로움에 공감하고 동포애에 젖기에 언어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조국을 떠나 낯선 타국의 이름 없는 협곡에서 외국어에 선율을 실어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고 인민의 해방을 부르짖는 동포 청년의 당시 심경이 아무런 장애 없이 전달되어 온다.
정율성 가문이 통째로 역사에서 배제된 이유
경성에 이회영 일가가 있다면 호남에는 정율성 가문이 있었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과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점령국의 횡포에 맞서 재산상 손실과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가족차원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정황까지 유사하다. 다만 정율성 가문이 통째로 역사에서 배제된 것은 정율성 이름이 갖는 금기의 비중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남한이 아닌 북한행을 택했고 다시 중국 귀화인으로 생을 마감한 격동기 운동가의 선택은 그와 조국 사이에 큰 간격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몸담은 조직의 결정에 순응했을 뿐 그의 선택이 어느 한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나 극단적인 적대의 결과는 아니었다. 실제 정율성의 삶에서 노선, 조직, 당 위에 존재하는 최우선 개념은 국가라기보단 인민이었다.
그는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인민이 주인 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가장 근접한 노선을 따랐던 연안 행이 그를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니 하는 국가형태로 이끌었을 뿐이다. 특정 체제에 대한 찬양이나 배척은 그의 주된 신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남한, 북한, 중국이라는 국가명이 그에게 얼마나 하찮은 구분이었는지를 알기는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애정을 갖고 관찰하면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그런 그였기에 어느 체제 내에도 온전히 융화하지 못한 이방인이었고 고국에서조차 잊힌 존재였다.
한중 우호분위기는 정율성의 존재를 고국에 되돌려 주었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천재 음악가의 진가를 뒤늦게 접한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지역 출신 음악가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관심과 자긍심은 더욱 두드러졌다. 광주 출신 천재 음악가를 기리고 홍보하기 위한 지자체 차원의 각종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율성 음악제와 행사가 제정되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지정되고 생가 터 보존, 기념물이 조성되는 등 '정율성'은 지자체가 탐내는 문화상품으로 떠올랐다.
광주 동구, 남구, 화순 등 그의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지자체간 과열 경쟁이 한때 지역 내에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반세기 넘는 동안 적국으로 분류되었던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한 인물에 대한 집착과 경쟁은 그동안 이념적 편견 때문에 존재감마저 부정 당해야 했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시류에 편승하는 현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2015년 12월엔 광주 MBC에서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이라는 고마운 다큐를 내보내기도 했다.
자신으로 인한 고향 지자체들의 다툼과 분쟁은 문화혁명 숙청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낚시로 소일해야 했던, 반목과 질시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음악인 정율성이 바라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연안시절 그는 궁핍한 환경에 생계도구였던 바이올린을 팔아 딸이 마실 산양 젖 값을 대야 했다. 형의 유품으로 고향 광주에서부터 품에 지녔던 바이올린을 팔아 딸의 목숨을 샀다. 그의 딸 이름 '샤오티친'은 바이올린의 중국식 발음이다. 형의 유품을 팔아 딸의 목숨을 구해야 했던 절박했던 시절에 대한 각성으로 그는 딸 이름을 '샤오티친'으로 지었다.
예술가, 혁명가로서의 일생에 영광과 시련, 명예와 고난이 교차하는 삶이었지만 아름다운 선율로써 인민에게 복무하리라던 맹세를 그는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 세기가 다 하도록 정율성 이름은 중국인민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음표, 도돌이표 같은 기호가 되었다. 그래서 중국인민들은 여전히 그를 기리고 그의 노래를 부른다. 도돌이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부르고 다시 반복하여 부르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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