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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보다 더 매력적인... 정려원·김선아·배두나의 가치

[2017 여성 드라마 결산] <비숲>부터 <품위녀>까지, '의미 있는' 여성 캐릭터들

17.12.31 19:33최종업데이트17.12.3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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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오랜 시간 동안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드라마 속에서조차 '캔디' 혹은 '꽃'이었다.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는 주도적인 남성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존재이거나 남성을 성장시키는 데 영감을 주는 존재 혹은 로맨스의 대상으로 소비됐다. 아니, 더 심한 경우 '폭력'을 겪는 상황이 '사랑'으로 둔갑하는 드라마의 설정조차 비일비재했다. 드라마의 소비자 중 다수가 여성이었음에도 말이다. 2017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방송사별 편성이 늘어난 드라마 시간만큼이나 안일하게 설정된 여성 캐릭터가 넘치는 한 해였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점차 커지는 여성주의 담론에 따라 괄목할 만한 드라마 역시 점차 많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지평이 넓고 깊어진 여성 캐릭터들을 볼 수 있었다. 또 그러한 여성 캐릭터를 맡은 여성 배우들조차 변화하는 사회적 인식을 뚜렷하게 체감하고 드라마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드라마 종영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40대 여배우 두 명이 등장하기도 하고 우리 드라마에 유독 여자 배우분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비즈엔터> '품위 있는 그녀' 김선아 인터뷰 중)

"내가 여기서 힘든 티를 내면 '30대 여배우를 주연으로 쓰면 힘들어. 너무 예민하고 별로인 것 같아. 남자를 쓰자' 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까 봐 얼마 안 되는 여자 타이틀롤 드라마에서 지치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파이팅 넘치게 끌고 가야 '여자가 타이틀롤 맡아도 별로 안 어렵던데?'라는 반응을 들을 것 같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오마이스타> '마녀의 법정' 정려원 인터뷰 중)

비록 시청률은 형편 없었지만, 작년 말에서 올해 초까지 방송됐던 드라마 <불야성>에는 기존 드라마에서 찾기 힘든 '서이경'(이요원)과 '이세진(유이)'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나왔다. ⓒ MBC


올해 초 배우 이요원과 유이의 호흡으로 '워맨스(워먼+로맨스의 합성어)'라는 단어를 각인한 드라마 <불야성>을 시작으로 올해의 드라마 속 빛나는 여성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을 톺아보았다.

성역할 '전복형 캐릭터'가 주는 쾌감

'뻔뻔한 속물 지향적인 검사',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이런 류의 캐릭터는 주로 남성의 차지였다. 굳이 드라마를 하나씩 거론하지 않아도 속물적인 전문직 남성 캐릭터가 따뜻하고 정의로운 여성 캐릭터에 의해 변화하고 성장해 사랑까지 느낀다는 설정은 한국 드라마의 흔한 설정 중 하나였다. <마녀의 법정>은 이런 설정을 전복시킨 마이듬 검사(정려원 분)와 여진욱 검사(윤현민 분) 캐릭터로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안겨 주었다.

극 초반 마이듬 검사는 출세에 눈이 먼 속물적인 검사로 다소 냉소적인 시선까지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릎을 꿇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는다('정의에 눈 감고 무릎을 꿇는다'는 설정마저도 지금까지는 줄곧 남성 캐릭터에게 부여됐다). 정려원은 마이듬 캐릭터의 완성도를 위해 매회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가벼운 정장을 걸치고 나와 줄곧 극의 흐름을 주도해 나간다.

KBS 2TV <마녀의 법정>은 그 시작부터 '권선징악'을 결말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드라마였다. 예상 가능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성공에는 기존 드라마가 외면했던 소재, 기존의 드라마가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있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 KBS


<마녀의 법정>은 소재 또한 기존 드라마에서 다룬 적 없는 '여성·아동 성범죄'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 드라마는 '몰카'를 비롯해 '데이트 폭력' 등 최근 논란이 되는 여성 이슈를 다루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드라마의 소재와 캐릭터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이런 '전복형 캐릭터'로 JTBC <힘쎈여자 도봉순> 속 '힘이 센 여성 영웅' 도봉순(박보영 분) 역시 빠질 수 없다. '힘이 지나치게 센' 도봉순은 이를 무기로 일상 속의 사소한 정의 구현에 앞장선다.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도봉순이라는 캐릭터는 그야말로 '판타지의 실현'이다.

외면하기 어려운 한계에도 불구하고 <힘쎈여자 도봉순>은 드라마 소재로도 찾기 힘든 '여성 영웅'을 전면에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꼽기 충분할 것이다. 물론 그 '여성 영웅'을 매력적이고 영리하게 연기한 박보영에게도 <힘쎈여자 도봉순>의 성공의 요인이 있을 것. ⓒ JTBC


비록 후반부로 갈수록 '여성 영웅'으로서 도봉순의 매력보다는 남자 주인공 안민혁(박형식 분)과의 '러브라인'으로 한없이 밋밋해진다는 점, '게이 캐릭터'의 활용에 있어 큰 한계가 있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관련 기사: 시청률 10%면 뭐해? <도봉순>의 결정적 흠결>). 그러나 <힘쎈여자 도봉순>은 배우 박보영의 '활용도'를 그 어떤 드라마보다 잘 알고 있다.

'가부장제의 틀'을 깨트린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을 쓴 백미경 작가는 곧바로 여성 배우 두 명이 '투톱'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를 선보인다. <품위 있는 그녀>는 JTBC가 창사한 이래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로 극 중 나왔던 두 여성 캐릭터 모두 시청자들에게 폭넓은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막장' 혹은 '통속극'이라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JTBC <품위 있는 그녀>는 김희선과 김선아라는 40대 여성을 투톱으로 내세워 '<태양의 후예>를 제외한 사전 제작 드라마는 망한다'는 공식을 산산조각냈다. ⓒ JTBC


<품위 있는 그녀>는 우아진(김희선 분)과 박복자(김선아 분)라는 캐릭터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드라마가 됐다. 극 중에서 우아진은 '가부장제'라는 틀을 주저 없이 벗어 던지며 이를 넘어 자기만의 성취를 이루는 인물이고, 박복자는 인간의 탐욕을 소름 끼치는 동시에 절절하게 그려낸다. 살아 숨 쉬는 캐릭터를 연기한 김희선과 김선아 모두에게 각자의 캐릭터가 '인생 캐릭터'가 됐음은 물론이다.

tvN <부암동 복수자들>은 '복수'를 위한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주제 의식이 <품위 있는 그녀>보다 훨씬 뚜렷하다. 가부장제 안에서 고통받는 여성이었던 이요원·라미란·명세빈은 '복자클럽'을 만들어 자신을 억압했던 가부장제 남성들에게 복수를 선사한다.

가부장제에 맞선 여성들 간의 연대를 보여준 드라마로 평가 되는 <부암동 복수자들>. 비록 그 '사이다'가 후반부에 나왔다고 하나 이요원·라미란·명세빈이라는 '쓰리톱' 여자 주인공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 tvN


비록 '복자클럽'의 존립 이유에는 '복수'가 있다지만 전혀 얽힐 일이 없을 것 같은 상반된 계층의 세 여성이 만난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복자클럽'을 통해 가부장제 아래 고통받았던 서로를 위로하고 새로운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배우 이요원의 필모그래피가 두드러진다. 배우 이요원은 2016년 '직장 갑질'에 통쾌하게 복수하는 여성을 연기한 JTBC <욱씨남정기>를 시작으로 연이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탐욕스러운 여성 대표 서이경(<불야성>)을 연기해내고 <부암동 복수자들>로 조금은 '다른'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맡아 해낸다.

좀 더 진보한 전문직 여성 캐릭터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은 여자의 적으로 살아온 거 아닌가요?" (<비밀의 숲> 한여진 대사 중)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드라마 10위에 tvN <비밀의 숲>을 선정한 바 있다. <비밀의 숲>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 한여진(배두나 분)은 한국 드라마에서 찾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여성' 경찰 캐릭터다(관련 기사: 여자의 적은 여자? <비밀의 숲> 배두나 대답이 통쾌하다). 위 대사처럼 한여진은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여성스러운'이라는 단어 안에 갇히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정체성도 뚜렷이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의 드라마'로 <비밀의 숲>을 꼽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러브라인' 없는 남녀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가능할까. 드라마 <비밀의 숲>은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이라는 통념을 깨버리고도 충분히 훌륭한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올해의 드라마'가 될 만하다. ⓒ tvN


줄거리 내내 한여진과 황시목(조승우 분)은 끈끈한 '팀워크'를 보여주지만 이들의 연대가 사랑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그렇다.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가 늘 사랑으로만 발전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시청률을 이유로 혹은 시청자를 핑계로 장르물 드라마들도 예외 없이 '러브라인'이라는 결말을 손쉽게 만들어냈다. <비밀의 숲> 속 세계에서는 성 역할로 나눈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우뚝 선 남성과 (비록 남성 경찰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할지라도) 여성만이 있다. '러브라인' 없이도 훌륭하고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비밀의 숲>은 보여줬다.

이수연 작가는 '여성 캐릭터들이 민폐가 아니다'라는 반응에 대해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 말을 많이 듣는 것이 의아하다"며 "'그간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정말 그렇게 민폐를 끼친 걸까?' 어쩌면 여성이 나오는 순간 '저건 민폐야', '의존적인 행동이야'라고 규정하고 봐서 그런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며 기존 통념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수연 작가는 이어 "어릴 때 영화를 보면 답답한 여주인공들이 물론 있었다. 악당과 남자가 싸우는데 벽돌이라도 집어 악당 뒤통수를 갈기진 못할망정 뒤에서 도와달라고 소리만 지르는 여자들. 요즘은 이런 여성을 본 적 없다"라고 답했다.

물론 기존에도 장르물 등에서 '여성 전문직' 캐릭터를 그려낸 경우는 꽤 있었다. 다만 이제는 여성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보다 그 '전문직'이라는 틀 안에서 여성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그려지는지가 더 중요한 요소가 됐다.

OCN <보이스>의 이하나가 맡은 강권주라는 역할은 '보이스 프로파일러'로 초능력에 버금 가는 청력을 가진 캐릭터다. ⓒ OCN


'여성 경찰'을 그린 <비밀의 숲>과 '여성 검사'를 그린 <마녀의 법정>, '여성 프로파일러'를 그린 OCN <보이스> 그리고 '여성 심리학 교수'를 그린 OCN <터널> 등은 직업인으로서 전문직 여성 캐릭터를 충실하게 그려낸다. 이 캐릭터들은 '사랑'에 몰두하기보다 '직업적 성취'와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고 남성들과 팀을 이뤄 사건을 해결해낸다. 그것이 여러 여성 전문직 드라마들 중에서 해당 드라마들이 얻어낸 성취라면 성취일 것이다.

이밖에도 '연민정'에 이어 또다시 '변혜영'이라는 독창적인 캐릭터를 들고나온 KBS <아버지가 이상해>의 이유리, 사극 속에서 드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MBC <역적>의 이하늬와 채수빈, 현실적인 '초보 엄마'를 연기한 KBS <고백부부>의 장나라 등이 올해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여성 배우로 시청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018년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양적·질적으로 개선된 여성 캐릭터를 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시청자들은 2017년에서 좀 더 나아간 여성 캐릭터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기준이 드라마를 비롯한 콘텐츠를 평가하는 데 있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은 2018년"이라는 말에 걸맞은 새로운 드라마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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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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