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NEO
케이와 명렬은 타자와 주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성의 전제가 되는 수많은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의신은 명렬을 믿었다. 케이가 가져다주는 피는 그 정체를 의심하지만, 명렬이 사람을 죽여서 낸 피는 당연히 동물의 피인 줄 알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 피의 출처를 알았을 때 의신은 질문을 던지고, 명렬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 중 하나인 '(더 훌륭한 목적을 위한) 살인이 왜 나쁘냐'는 식으로 맞받아친다. 인간은 결국 사람을 죽이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며 얻어낸 것들이니까.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실험을 하다가 의신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미 몰락한 그가 다시금 또 추락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명렬은 자신의 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의신을 몰아세우고, 그 과정에서 의신에게 물린다. 그리고 케이와 의신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이자, 그들이 은신했던 폐가로 향한다. 그 때 케이는 햇빛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는다. 그는 의신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뱀파이어에서 인간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칼을 맞고 죽어가는 케이에게 의신은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권한다. 다시 뱀파이어가 되면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케이는 거부한다. 대신 오롯이 죽어가기를 택한다. 그런 케이의 곁에서 의신 역시 빛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택한다.
이 때 극의 제목 '배니싱'의 뜻이 발휘된다. 인간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여느 존재들처럼 결국 '사라지는' 그리고 지금도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다. 다소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인 결말에서 오히려 비극성을 제거하는 건 그 죽음이 무대에서 묘사되는 방법이다.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의신의 모습은 숭고하다. 그는 실패했지만, 실패함으로써 영웅이 된 자다.
보통 빛은 생명을, 어둠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그 흔한 상징은 전복된다. 그들이 죽는 순간, 무대에는 가장 따뜻하고 밝은 빛이 가득 찬다. 삶과 죽음, 유지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경계를 허문다. 사라져가는 순간에 오히려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휴머니즘'적이다. 인간의 필연적 한계이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빛을 맞이하고 따스함을 누린다.
극 중 자주 등장한 단어는 '인간'만이 아니다. 케이의 입에서 발화되던 '온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배니싱>은 인간이 어떤 존재라고 응답하진 않지만 조심스레 제시한다. 다른 몸을 가진 우리들은 서로 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온기가 되어줄 수 있진 않느냐고.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 한계 속에서, 서로의 곁에 있어줌으로써 그 공포의 순간을 빛나는 순간으로 전환할 수 있진 않느냐고. 공연장의 빛이 무대에만 머물지 않고 관객석까지 비춰질 때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어쩌면 무대와 객석이라는, 서로 분리된 공간 속에 있던 존재들이지만 그 '빛의 순간'에 함께 있는 것, 이는 관객들이 <배니싱>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윤리적 체험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흡혈할 수도, 뱀파이어가 될 수도 없다. 주체가 직접 권력을 해체하고 온전한 타자가 되어보는 것 또한 어렵다. 과학과 의학, 역사 그 자체가 인간들에겐 착취의 시간이었고 지금의 삶도 그러하다. 도덕도, 과학도, 역사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린 결국 죽을 존재들이고, 이 모든 시간은 사라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결국 사라질지라도 감히 선택하는 것, 타인의 곁에 온기로 남아주는 것, 함께 해주는 것, 이것들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동이 틀 때 사라지던 의신과 케이는 어쩌면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이 아니었을까.
공연 예술의 특성상 <배니싱>은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다.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명확하게 답하지 않은 <배니싱>. 대신 '사라짐의 과정'을 겪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관객들에게 질문은 넘어간다. 어쩌면 그 답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른다. 그 질문은 그저 사라져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때 의신과 케이가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그 질문들 역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에 대해 다시금 물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