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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여자, 정말 아랑은 그런 인물이었을까?

[연극·뮤지컬 #여성주의 연말 정산 ①]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 <아랑가>

16.12.31 18:52최종업데이트17.07.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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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이 끝났다. 2016년에도 많은 작품이 공연됐으며, 그만큼 많은 관객이 공연장을 찾았다. 많은 스타의 연극·뮤지컬계 진입, 연극·뮤지컬 배우들의 스타화, 팬 사이의 입소문 등 덕분에 올해도 공연 시장은 몸집을 부풀릴 수 있었다. 이는 일반 관객들뿐 아니라 '연뮤덕(연극 뮤지컬 마니아)'의 증가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이 커졌고, 다양한 작품들이 공연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인 관점의 공연들은 아직 충분하지 못했다.

공연은 2016년에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2017년에도, 2018년에도, 그 훗날에도 많은 작품은 올라올 것이고 또 올라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으레 하던 연말 정산처럼, 몇 가지 작품을 '여성주의'라는 키워드로 읽어보는, '연극 뮤지컬 #여성주의 연말 정산'을 해보려 한다. 다음에 올라올 때는 더 좋은 작품이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2월 14일부터 4월 10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관객을 맞았던 뮤지컬 <아랑가>의 공연 사진. 배우의 열연과 애절한 넘버 등이 어우러진 창작 뮤지컬계 수작이었으나, 젠더적 관점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올해 초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쇼케이스를 마치고 충무아트홀 블랙에서 공연된 <아랑가>는 많은 관객의 기대를 산 작품이다. 예그린어워드에서 수상했기도 했고, 꽤 오랜 기간의 개발을 거쳐 올라온 작품이기도 했다. 화려한 캐스팅 진도 한몫했다. 캐스팅 보드의 배우들은 '연뮤덕'이라면 대부분 한 번씩 들었을 법한 이름이었고, 신인 배우들 또한 쇼케이스를 통해 실력을 검증받았다. 또한 판소리계에서는 이미 정평이 난 박인혜가 도창 역으로 합류하며 <아랑가>는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시작했다.

작품 도중 팬서비스들도 잊지 않았다. 첫 공연 전석 매진 허그회, 커튼콜 데이, 손익분기점 달성 기념 파티 등의 자리로 <아랑가>는 '회전문 관객'들에게 섭섭지 않은 팬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손익분기점 달성 기념 파티를 성사시켰고 더 나아가 개로 역의 배우 강필석은 예그린 뮤지컬 어워드에서 남우주연상을 타게 했다. 뮤지컬 <아랑가>는 소극장 초연 창작 뮤지컬의 저력을 보여준 셈이다.

그런 <아랑가>이지만 젠더적인 관점을 토대로 바라봤을 때는 '창작 뮤지컬의 저력'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 <아랑가>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팬서비스까지 챙긴 수작이지만, 젠더적으로는 아쉽다

예그린어워드 수상 등에서 증명되듯, <아랑가>가 나쁜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서사 속에 여성 캐릭터를 가두었다. 극본 그리고 그 극본 안의 인물을 살폈을 때는 여러 비판 소지가 많다.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아랑가>는 극의 제목에 여성 인물 '아랑'을 내세웠고, 이는 일부 관객들이 여성이 주요 서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을 기대하도록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극의 전개는 전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서사이다. 극의 시작과 끝은 '개로'의 시점으로 이뤄진다. 이는 비단 시작과 끝뿐만이 아니다. 극의 전개는 전적으로 개로를 중심으로 '꿈속의 여인'을 이야기하며 그를 속이고자 하는 도림, 그의 충직한 신하였으나 끝내 왕에게 배신당한 도미를 따라 흘러간다.

지나치게 개로 중심적인 서사는 극의 제목이 <아랑가>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물론 극 중에서 아랑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노래 '아랑가'를 개로에게 가르쳐주지만, 단지 이 이유만으로 극의 '제목'이 <'아랑'가>인 것은 불충분하다. 어쩌면 이 극의 제목은 <아랑가>가 아닌 <'개로'가>가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서사가 개로에 의해서 진행됐으니 말이다.

또한 '아랑가'가 극 중 그토록 중요한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아랑 개인의 역량이 아니었다. 이는 남성 캐릭터이자 극 중 대부분의 서사를 이끌고 가는 '개로'의 입에서 '아랑가'가 불리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아랑가의 노랫가락은 아랑과 아랑의 어머니가 만들었을지라도, 아랑가가 의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회적인 이름을 부여받으며 극의 이름까지 될 수 있던 것은 결국 남성에게 종속되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든다.

아랑, 너는 무엇이냐?

본래 원작 설화 속 아랑은, 이렇게까지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런 적극성이 다소 지워진 모양새이다.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아랑은 남성 중심적인 사고관 아래에서 침묵해오던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그녀가 지닌 '소신'이나 '사랑'은 언제나 '정절'처럼 그려졌다. 심지어 그녀는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이름보다 '도미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오랜 역사가 지나고 나서 1937년이 돼서야 박종화 작가의 단편 소설 <아랑의 '정조'>에서 비로소 명명되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소신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남성이 한 여성을 평생 사랑하는 것과 여성이 한 남성을 평생 사랑하는 것은 여러 문화 콘텐츠에서 다소 다르게 그려졌다. 예컨대 남성이 한 여성을 평생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벤츠 캐릭터'처럼 묘사됐다. 하지만 한 남성을 향한 여성의 감정은 언제나 '정절'이나 '정조'로 규정되었다. 여성이 젠더 체계에서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임을 드러낸다.

물론, 뮤지컬 <아랑가>가 아랑을 그런 '정절녀'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백제 시대의 설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지녔던 '적극성'을 지워버렸다는 게 아쉽다. 실제 아랑(도미 부인)설화에서 아랑은 왕을 두 번이나 속일 정도로 적극적인 여성이다.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고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진취적이며 용기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극 중 <아랑가>에서 아랑은 그저 '멈추어 주시오, 왕이시여!' 같은 대사를 외치는 정도가 다이다. 물론 극의 말미, 그녀가 왕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신에서 약간의 주체성을 엿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극 전반적으로 원작의 아랑에 비하여 소극적인 인물로 평가됐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의 모성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성'만' 강조하는 건 캐릭터를 도구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게끔 한다.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극 중 아랑은 또한 개로에게 있어서 '성녀'처럼 그려진다. 개로에게 아랑은 매화꽃 향기가 나고, 피 흘리는 자신을 치료해주며, 자신이 안길 수 있는 '꿈속의 여인'이다. 아랑이 개로의 꿈속의 여인이 된 것은 아랑과 개로의 어린 시절의 만남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숲속에 버려진 개로를 아랑이 찾는데, 이때 두 사람은 서로의 '어머니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아랑은 숲속의 개로에게 '아랑가'를 불러주는데 어머니가 부재하는 상황,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저주를 받은 상황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결핍을 느끼는 개로에게 아랑은 성녀이자 어머니처럼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유사 어머니로 대체된다. 결국 그녀는 개로의 매화 꽃향기가 나고 개로를 치료해줄 수 있는 이미지 같은 이상향으로 고착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랑의 '어머니화'는 아랑과 사한 사이의 유사 모자 관계와도 연결된다. 사한과 개로는 닮았다. 사한 또한 어머니가 부재하는 캐릭터이며 그는 도미-아랑 부부의 도움을 받아 살 수 있었다. 극 중에서 말을 더듬는 사한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랑의 모습은 어린아이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는 어머니를 연상시킨다. 그런 사한과 개로가 공유하는 공통점은 바로 어머니가 부재하고 아랑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 캐릭터 성에서 그치지 않고 극 중 사한 역의 배우가 개로의 어린 시절을 재현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성녀 이미지는 창녀 이미지와 함께 대표적으로 여성이 대상화되는 방식이다. 모성의 강조도 일종의 대상화이다. 자칫 잘못하면 여성을 특정 범주에 가둘 위험이 있다. 즉, 아랑은 '성녀'적인 성격을 지닌, '어머니'와 같은 기능만을 극 중에서 수행한다. 이는 캐릭터의 수동성과 맞물려,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씌워졌던 전형적 이미지를 재생산할 수 있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극이, 실화와 똑같은 줄거리와 설정으로 인물을 그려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현대'에서 '재구성'한다는 것은 기존 인물의 매력이나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함이 아닐까. 여성성을 '소극성', '희생하는 여성상' 등으로 앞세우는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아랑의 캐릭터 구현은 사회적인 '여성성'과 이를 만들어낸 여성 혐오를 어느 정도 재생산한 것이 아닐까,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소극적이고 희생적인 여성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아랑의 삶은, 그 자신의 삶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문제는 현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체제 내에서 여성들이 소극성 등의 여성성을 강요받는 데에 있다. 소극적인 여성들에게 자신이 소극적이거나 희생하기를 원할 수 있는 상황을 줬던가. 소위 말하는 '여성성'을 지니지 못한 여성들은 '드세다', '여자답지 못하다' 등의 표현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되는 상황 속에서, 정말로 여성들이 그런 '여성성'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가. 아랑의 주체성이 정말로 역사 속에서 아랑의 '주체성'으로 기록되고 재현됐던가.

극 중 마지막 대사는 개로의 대사 "아랑, 너는 무엇이냐?"였다. <아랑가>가 막을 내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이 시점,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아랑가와 앞으로 새로이 공연될 수많은 작품을 향해 질문한다.

"아랑, 너는 무엇이냐?"

아랑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여성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개로의 대사를 빌려 질문해본다. 공연계 성 평등은 언제 온단 말이냐? 그날이 올 때까지, 관객들과 창작자들은 개로가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았던 것처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할 것이다.

창작진의 더 많은 질문을 통해, 뮤지컬 <아랑가>가 조금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아랑가 뮤지컬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연말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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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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