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가득한 기타들김광석씨는 20대 시절 잘 나가는 기타리스트였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 1000만 원 정도 했는데, 그는 한달에 600만 원 이상을 벌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기타였고, 술과 잡기를 하는 대신에 악기점에 들러 기타를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였다. 하루에 4~5개를 구입하는 경우도 있어, 이 문제로 부인과 다툼도 있곤 했다.
조우성
그는 학교 근처 음악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낙원상가 악기점에 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악기점 앞에서 "이거 큰일 났네. 오늘 여기서 기타를 빌려주기로 했는데 문을 안 열었네. 지금 빨리 가야 되는데 어떡하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룹사운드 '범스' 였는데, 그는 자신의 기타를 이들에게 빌려주었고, 그들을 따라간 곳이 해밀턴호텔이었다.
"호텔을 막 지어서 지하나이트클럽을 오픈하는 날이었어요. 딱 들어가니 무슨 별세계에 온 것 같았죠. 맨날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형님들이 물 좀 가져와 이러면 떠다 주고, 그렇게 거기서 2~3개월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행복했어요."'범스'가 클럽에서 방출되면서 그는 동두천 미군부대 클럽에서 활동하는 '허밍보드(humming board)' 팀에 들어갔다. 미8군을 돌면서 연주활동을 했는데,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7~8개월 활동하다가 팀이 깨지고 '파이브 에이스'의 일원이 되었다. 대구의 미군부대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노숙자 차림의 김옥동씨가 찾아 오더니 광석씨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우겼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저보고 대한민국 음악 발전을 위해 같이 가자고 그래요. 완전히 황당했죠. 이 사람이 일주일 동안 사람들을 붙잡고 조르는 거예요. 팀원들이 저를 참 좋아했는데, 느닷없이 이상한 사람이 저를 데려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니 웃기는 상황인 거죠. 근데 일주일이 지나자 마스터가 날 부르더니 광석아 너 이 사람 따라가라 이러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하고 그를 따라 서울 이태원으로 와보니 골방에 건반 하나만 달랑 있고, 팀도 없는 그야말로 황당한 상황이었다. 돈이 없어 걸어 다녔고, 보름 동안 라면만 먹었다. 그러다 팀이 하나 만들어졌고, 부평역 앞에 미군 부대를 위한 조그마한 클럽에서 연주하였다. 클럽 위층의 문 닫은 당구장의 당구대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은 사람들이 먹다 남은 것을 걷어서 먹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전부 거지가 되어버렸다.
"하루는 밥을 먹고 논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걸어와요. 딱 보니 엄마예요. 제가 병역신체검사를 받지 않아 더는 미루면 병역기피가 되는 심각한 상황이라 어머니가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엄마가 나를 한참 보더니 갑자기 길에 털썩 주저앉더니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데요. 내 아들이 거지 됐다고."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기타는 나의 운명그는 기타가 좋다. 마냥 좋다. 앉으면 자연스레 기타를 잡는다. 좋아서 기타를 친다. 즐거워서 기타를 연주한다. 기타를 치면 그는 행복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기타를 치다 자신의 기타소리에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기타는 그의 운명이다.
김광석
신체검사를 받은 후 문산에서 활동하다 이태원 세븐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팀에 들어갔다. 당시 최고 수준의 음악을 하는 곳이 이태원이었고, 그중에서도 세븐클럽에 우리나라 최고 밴드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가 21살이었다.
"이태원에서 음악 하던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시기였어요. 하루하루가 콘서트였죠. 미군들이 보통 클럽에 오면 맥주 마시고 춤추고 그러는데, 여기는 음악 들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 맨날 공연하는 거죠. 그때 연주했던 감각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죠. 좋은 곡도 그때 많이 만들었어요. 한 1년 정도 이태원에서 활동했어요."22살 때 그룹사운드 '히파이브(He 5)'로 자리를 옮겼다. 김봉탁씨가 미국으로 가고 그 후임으로 광석씨가 들어갔다. 23살 때쯤, 인기를 얻으며 하루에 두세 곳에서 활동하던 중 당시 최고의 드러머였던 배수연씨가 찾아와 '세션(레코딩을 위해 곡을 연주하는 일)'을 제의했다. 조용필씨의 '친구여'를 작곡한 피아니스트 이호준씨의 편곡녹음이었는데, 이게 김광석씨의 첫 세션 작업이었다. 그는 가끔 '세션맨'을 하면서 퍼시픽호텔 무겐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클럽이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사랑과 평화도 같은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2층 중간에 매일 6~7명이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기타 치는 광석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제 기타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전속세션팀원들이 클럽에 와서 며칠 동안 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 그중의 한 명이 오더니 자신은 앨범을 녹음하는 전속세션팀의 총무인데, 세컨드 기타를 담당했던 사람이 가수로 전업해서 세컨드 기타가 필요하다고, 함께 일하겠냐고 묻더라고요. 전속세션팀은 최고가 아니면 되기 어렵고, 전속세션맨이 되면 클럽에서 일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수입과 명성이 생기니 바로 O.K 했죠. 나는 뭐 장원급제 한 거죠. 저에게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난 거죠."당시엔 전속세션멤버가 아니면 앨범녹음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세션 작업은 녹음을 하다 실수를 거듭하면 팀에서 바로 쫓겨날 정도로 엄격하고 살벌한 프로의 세계다. 김광석씨는 1년 12달 쉬지 않고 세션맨을 하면서 히파이브 그룹사운드 활동도 겸했다. 쉬는 날이 없었다. 연주하다 자면서 꿈을 꾼 적도 있다. 어떤 때는 악보가 하얀 백지로 보인 적도 있었다. 당시 아파트값이 1000만 원 정도 했는데, 그가 한 달 버는 수입이 600만 원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잘 나가는 연주자였다. 하지만 잠을 못 자는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실전에서 닦은 연주실력그는 22살 부터 시작한 세션작업을 40여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아침 9시 반부터 시작해 오후 5시 반까지 긴장속에서 녹음연주를 한다. 실전에서, 최고의 팀원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그의 내공은 넓고 깊게 쌓여 온 것이다.
김광석
"아침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녹음실에서 연주한 후 밤에는 클럽에서 새벽 4시까지 활동하고,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집으로 돌아와 밥 한 그릇 먹으면 6시가 되요. 녹음실에 아침 9시까지 가야 하니 잠을 잘 시간이 없었어요. 잠시 쪽잠 정도 자는 거죠. 보름간 잠을 못 잔 적도 있어요. 제가 운전하다 사고가 났는데 그게 졸음운전이었어요. 제가 23살에서 29살까지 6년간 그런 생활을 했는데, 지금은 일주일만 그렇게 하면 죽을 것 같아요.쉬지 않고 일을 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이전부터 제가 여러 번 그룹사운드를 탈퇴하려고 그랬어요. 근데 다들 만류하는 거예요. 마스터가 너 빠지면 대책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몇 년을 끌었어요. 나중에는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었는데 아버지가 그 때 너 그러다 죽어 라는 소리를 하더라고요. 이런 생활 계속하다가는 정말 죽겠다 싶어 '히파이브' 활동을 결국 접게 되었죠."녹음실 일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9시 쯤 도착해서 셋팅을 하고 9시 30분 부터 작업에 들어가 1시에 끝낸다. 이게 한 타임이다. 돈은 한 타임으로 계산한다. 점심 먹고 2시부터 5시 30분까지 연주하는데, 보통 10곡에서 20곡 정도 작업하였고, 많을 때는 40곡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틀린 곳이 있으면 바로 수정할 수 있지만 그때는 동시녹음이니까 중간에 미스가 나면 전체를 다시 녹음 해야 되었다. 그러니 연주할 적에 초집중해야 된다. 광석씨의 내공은 녹음실에서 쌓여갔다.
"실전으로, 그것도 최고의 수준에서 죽기 살기로 기타를 연주한 거죠. 나 혼자 편안하게 연주하는 것과 돈 받고 녹음실에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거기 잘못 됐어 지적 받아가면서 연주하는 거랑 다르잖아요. 월드컵에서 실전으로 뛴 캐리어랑 동네에서 연습 삼아 운동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잠도 못 자고 쉴 틈 없이 연주했던 시간들이 저에게는 엄청난 연습시간 이였던 거죠. 아마 그 누구도 그렇게 해보지 못 했을 거예요." 김광석 기타리스트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제프 백(Jeff Beck)'을 많이 닮았다. 블루스, 록, 재즈 등 음악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이 닮았고, 그룹사운드에서 솔로로 전향해서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는 것도 닮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도 닮았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김광석씨의 음악세계에 대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다음 기사: 그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 "아직도 배우는 학생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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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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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김광석, 그에게 기타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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