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시즌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에이스들이 포스트 시즌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보인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역 최고의 투수라 할 수 있는 클레이튼 커쇼(정규 시즌 통산 265경기 126승 60패 평균 자책점 2.37)가 포스트 시즌에서 유독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만 만나면 승리하지 못했던 점(5경기 4패 6.14)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전까지 포스트 시즌에서 잘 던졌던 투수가 충격적인 패배를 떠안았다는 사실은 경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등판했던 왼손 투수 콜 해멀스(텍사스 레인저스)의 부진은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10월 7일(아래 한국 시각) 미국 텍사스 주 알링턴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열렸던 텍사스 레인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해멀스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충격적인 등판을 경험했다. 이전까지 포스트 시즌 15경기에 선발로 등판하면서 7승 5패를 기록하고 있었던 해멀스였지만 불운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월드 시리즈 MVP 이력, 포스트 시즌에서 강했던 해멀스
무너졌던 순간도 있었지만, 해멀스는 포스트 시즌에서 강한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이던 2008년 포스트 시즌 5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4승 무패 평균 자책점 1.80을 기록했던 해멀스는 당시 다저스와 붙었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도 MVP를 차지하며 소속 팀의 월드 챔피언을 이끌었던 에이스였다.
당시 필리스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를 제패하던 강팀이었다. 때문에 해멀스는 포스트 시즌을 경험할 기회가 많았고, 이후 필리스가 하위권으로 떨어진 뒤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 카드로의 활용 가치가 높았다.
그러던 상황에서 2015년 여름 트레이드 마감 시한에 레인저스가 해멀스 영입을 시도했다. 해멀스는 필리스와 맺었던 장기 계약이 2018년까지 남아 있는 상황이었고, 2019년에 옵션도 걸려 있었다. 게다가 당시 레인저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은커녕 승률 5할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2015년 여름 해멀스를 영입한 레인저스는 시즌 마지막 날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고, 2016년에도 아메리칸리그 15개 구단 중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포스트 시즌 진출을 확정 지었다.
팔꿈치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일본인 투수 다르빗슈 유를 포스트 시즌 1차전에 내보낸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다르빗슈보다 포스트 시즌 경험이 더 풍부한 해멀스였기에 레인저스의 제프 배니스터 감독은 해멀스에게 디비전 시리즈 1차전과 5차전 선발의 중책을 맡겼다.
메이저리그 11년 차를 맞이한 해멀스인 만큼 관록도 있었다. 포스트 시즌 7승은 역시 2003년 월드 시리즈 MVP와 2007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를 경험했던 조시 베켓(은퇴)과 같은 승수였다.
"보이지 않는 실책", 해멀스도 울었다
이날 경기에서 해멀스는 2회까지 무실점으로 토론토 타자들을 봉쇄했다. 그러나 호투하던 해멀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악몽의 3회가 시작됐다. 3회 2사까지는 좋았다. 선두 타자 멜빈 업튼 주니어를 공 1개 만에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했고, 에즈키엘 카레라에게 볼넷을 허용했지만, 다음 타자인 드본 트래비스도 3루수 파울 플라이로 잡아냈다.
다음 타자인 조시 도널드슨의 타석부터가 문제였다. 도널드슨의 타구는 레인저스 3루수 애드리안 벨트레의 글러브를 맞고 뒤로 튀면서 2루타가 됐다. 실책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지만, 기록원은 도널드슨의 안타로 인정했다. 이 타구로 누상에 있던 카레라가 홈까지 밟으면서 해멀스는 자책점을 기록했다(0-1).
다음 타자 에드윈 엥카르나시온의 타구는 해멀스 자신의 글러브에 맞았다. 글러브에 맞은 공을 찾아서 잡고 던지는 동안 엥카르나시온은 1루 베이스를 밟으며 내야 안타가 되고 말았다. 다음 타자 호세 바티스타와의 대결에서는 2볼 1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바티스타가 4번의 커트 끝에 적시타를 때려냈다(0-2).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해멀스를 진정시켰지만, 소용없었다. 다음 타자 러셀 마틴과의 대결에서 해멀스는 5구 대결 끝에 볼넷을 허용하면서 만루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트로이 툴로위츠키와의 대결에서 툴로위츠키의 타구도 중견수 이안 데스몬드가 좀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데스몬드가 타구를 늦게 쫓기 시작하는 바람에 중견수 키를 넘기는 장타가 되고 말았다. 누상에 있던 주자 3명이 모두 들어왔고(0-5), 타자 툴로위츠키마저 3루까지 달렸다. 다음 타자 케빈 필라를 투수 앞 땅볼로 잡아냈지만, 이미 토론토의 타선은 3회에만 한 바퀴를 돌면서 해멀스를 괴롭힌 뒤였다.
3회에만 타자 일순을 허용하며 두들겨 맞고 5점이나 내준 해멀스는 4회 초 수비에서는 다시 선두 타자 업튼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했다(0-6). 카레라를 좌익수 뜬공으로 잡았지만, 다음 타자 트래비스에 유격수 실책으로 출루를 허용했다.
다음 타자 도널드슨의 타석 때 포수가 해멀스의 공을 잡지 못한 사이 트래비스가 2루까지 밟았다. 그리고 도널드슨의 적시타로 트래비스가 또다시 홈을 밟았다(0-7). 해벌스의 7실점 중 비자책점으로 기록된 점수는 바로 이 트래비스의 득점뿐이었다. 그리고 투구는 여기까지였다. 배니스터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고, 투수는 알렉스 클라우디오로 바뀌었다. 이날 해멀스의 투구 기록은 3.1이닝 6피안타(1피홈런) 3볼넷 1탈삼진 7실점(6자책)이었다. 총 투구 수 82구 중에서 해멀스는 3회에만 무려 42개의 공을 던졌다. 7실점은 해멀스가 여태까지 던졌던 포스트 시즌 경기 중 최다 실점이었다.
첫 타석부터 다운된 분위기, 그래도 유일한 타점 올린 추신수
손목 골절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추신수는 바로 철심들을 고정하는 금속판 삽입 수술을 받았다. 애초 진단 결과에 의하면 전치 8주로 디비전 시리즈 출전은 물론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도 처음 2경기 출전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추신수는 놀라운 회복 속도로 시즌 막판 다시 로스터에 합류했고, 포스트 시즌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다만 배니스터 감독은 그를 1번 타순이 아닌 9번 타순에 배치했다. 부상에서 복귀하고 타격감이 아직 완전히 올라오지 못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추신수가 첫 타석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3회 초에 해멀스가 42개의 공을 던지며 5실점 했던 악몽이 지나간 뒤였다. 비록 타격감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지만, 추신수의 눈 야구는 살아있었다. 상대 선발투수 마르코 에스트라다를 상대로 볼 카운트 2볼 2스트라이크까지 끌고 가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5구째 공이 스트라이크 존 바깥으로 흘러갔고, 추신수가 이 공을 지켜봤지만 주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루킹 삼진이 되자 추신수는 주심에게 스트라이크 존 판정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6회 말 두 번째 타석에서는 엘비스 앤드루스가 출루한 가운데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에는 풀 카운트 승부까지 갔고, 런 앤드 히트 작전이 나오면서 2개의 공을 연속으로 쳤지만 모두 파울이 됐다. 그리고 다음 공에 추신수가 헛스윙 삼진을 당했는데, 작전 실패로 인하여 앤드루스까지 도루 실패로 병살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앤드루스가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비디오 판독 요청은 없었다.
9회 말 추신수의 3번째 타석이 돌아오기 전, 레인저스는 9회 초 마지막 수비에서 3점을 추가로 허용하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0-10). 9회 말 추신수 타석에 앞서 앤드루스가 3루타로 출루해 있는 상황이었다. 추신수는 2구째 공을 잡아당겼지만 1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이 사이 앤드루스가 홈을 밟으면서 추신수는 이날 경기에서 팀의 유일한 타점을 기록했다(1-10). 추신수가 최선을 다해 타점을 올렸지만, 경기를 뒤집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다음 타자인 카를로스 고메스와 이안 데스몬드가 연속 아웃을 당하면서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레인저스는 이날 해멀스를 시작으로 클라우디오, 토니 바넷, 제이크 디크먼 등 총 4명의 투수를 투입했다. 그러나 경기 초반에 워낙 충격적인 대량 실점을 했고, 상대 투수 에스트라다가 완투에 가까운 투구를 하며 레인저스 타선을 봉쇄하는 바람에 레인저스는 대타 작전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했다. 추신수의 타점으로 완봉에 실패한 에스트라다는 바로 교체되어 8.1이닝 4피안타 무사사구 6탈삼진 1실점 승리를 거뒀다(98구).
우려되는 레인저스의 PS 홈 성적, 오히려 독이 된 홈 어드밴티지
리그 1위를 차지하고 월드 시리즈까지 올 라운드 홈 어드밴티지를 확보한 레인저스지만, 이날 패배로 레인저스는 홈 어드밴티지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 성적을 남겼다. 디비전 시리즈는 중부지구와 와일드카드 제도 시행 이후 첫 포스트 시즌이었던 1995년부터 시행되었고, 이날 경기까지 합해 레인저스의 디비전 시리즈 홈 경기 성적은 1승 10패로 처참하다.
레인저스는 1996년에 창단 이후 첫 포스트 시즌 진출을 이뤄냈는데, 이후 7번의 지구 우승과 1번의 와일드카드 획득을 포함, 모두 8번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레인저스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 오른 2010년이 되기 전까지 3번의 포스트 시즌에서 모두 디비전 시리즈 탈락이라는 굴욕을 맛보았다.
하필이면 1996년, 1997년 그리고 1999년 모두 디비전 시리즈 상대가 당시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뉴욕 양키스였던 탓이었다. 당시 양키스는 레인저스와 맞붙었던 시기 모두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을 차지하며 월드 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그리고 양키스는 1997년 와일드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플로리다 말린스(현 마이애미 말린스)에게 패한 것을 빼고는 나머지 두 번은 월드 챔피언까지 올랐다.
이 때문에 레인저스는 1990년대 포스트 시즌에서 홈 경기 승리가 한 번도 없었다. 2010년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홈 경기였던 3차전과 4차전을 모두 졌고, 원정 경기 3경기(1, 2, 5차전)를 모두 이기고 창단 첫 CS 진출을 이뤄낸 레인저스였다. 레인저스는 2010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이 되어서야 포스트 시즌 첫 홈 경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레인저스가 1990년대 양키스에게 워낙 밀렸던 탓에 디비전 시리즈 홈 경기 성적이 워낙 안 좋은 탓도 있다.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월드 시리즈 진출에 필요한 승리를 거두기는 했다. 2011년 월드 시리즈는 비록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인저스가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이 2번에 불과했던 이유가 바로 이 디비전 시리즈 홈 경기 징크스 때문이었다. 게다가 리그 1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3경기를 치르는 홈 경기 어드밴티지가 오히려 역효과로 적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날 등판했던 해멀스의 경우 올 시즌 홈 경기 성적이 5승 2패 4.40에 불과했고, 낮 경기 성적이 4승 2패 4.47에 그쳤다. 하필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은 낮 경기였다.
레인저스는 1961년에 창단하여 메이저리그 구단 중 역사가 긴 편은 아니다. 워싱턴 세네터스로 시작하여 1972년 지금의 텍사스 주 알링턴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하지만 이러한 징크스 때문에 아직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 적은 없으며 올 라운드 홈 어드밴티지를 확보한 올해도 다소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한 레인저스가 다음 2차전에서 어떠한 경기력을 보여줄지 일단 다음 경기를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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