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하리가 간직한 소녀 감성작 중에서 마타하리의 '소녀다움'은 수차례 강조된다. 하늘의 별을 보는 아르망과 함께 꿈을 꾼다든가, 아르망의 선물에 뛸 듯이 기뻐한다든가. 결국 이 물랭루주를 지배하던 여주인 마타하리도 그저 마음속에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일 뿐이라는 얘기로 귀결된다.
이정민
뮤지컬 <마타하리>에서 그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마타하리 그녀 자신에게 있다. 옥주현이나 김소향이라는 배우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예전의 그 소녀'를 노래하는 작품 속 마타하리는 팜파탈이 아니라 그저 소녀 시절의 순애보를 간직한 전형적이고 수동적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한 여성의 불행과 트라우마를 말하기 위해 강간이 등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강간은 무엇에 의한 폭력이었으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없다.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은 부분을 상상력을 더해 재창조할 수 있다. 다만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전형적이고 식상한 여성 캐릭터가 마주하는 전쟁의 역사 역시, 전형적이고 식상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단절하고자 하는 과거는 남성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었고, 그녀가 추구하는 미래 역시 사랑하는 남성과 함께 하는 내일이다. 남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 여자는, 아무리 잘 봐줘도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사실은 여린 구석이 있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이다.
팜파탈은 그녀에게 매혹된 주변 남성을 파멸하게 하는 게 전매특허인데, 그런 남성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타하리>의 기본 틀은 마타하리와 아르망, 라두 대령의 (뻔한) 삼각관계이다. 그녀가 사랑한 아르망이 아마도 유일하게 불행해진 남성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라두 대령이다. 마타하리가 이중스파이가 되는 과정도 라두 대령의 협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와중에 그녀가 실제로 전쟁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도 대사 몇 마디로 대충 처리되는 바람에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라두 대령에 의해 목숨을 잃는 과정까지 그녀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아르망을 만나서 사랑 타령을 하다가, 그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고 그 사랑 과정이 심금을 울릴 정도로 절절한가. 아니다. 2막에서 갑자기 아르망이 퇴장하는 덕분에 이야기를 하다 만 듯하다. 마타하리의 군사재판 장면 중, 객석에서 아르망의 환상이 무대로 난입할 때 감탄이나 박수가 아니라 실소가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소향, 절정의 관능미팜파탈은 권력의 칼자루를 남성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쥔다. 노출을 통한 팜파탈의 매력 발산은 그 맥락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 맥락은 사라지고, <마타하리>에는 노출만 있었다.
이정민
그녀의 팜파탈적인 면모가 유일하게 보이는 건 '아마도' 시종일관 가슴이 드러나는 의상일 것이다. 물론 남녀를 막론하고 배우가 육체의 아름다움을 무대에서 표현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그 노출이 어떤 맥락에서 대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득이 없다는 것이다. 극 초반에 등장하여 이국적인 춤을 추는 마타하리는 당시 마타하리가 물랭루주 무대에서 어떤 매력을 뽐내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물랭루주 바깥에서 활동하는 그녀의 거의 모든 옷은 가슴 가운데가 파여 있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가슴 노출했다고 팜파탈이라는 건, 스모키 화장을 했다고 팜파탈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오죽하면 배우가 프레스콜 현장에서 한손으로는 마이크를, 한손으로는 벌어진 가슴을 여미고 있을까.
▲죽음을 맞게 되는 마타하리수미상관 구조로 마무리되는 엔딩.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오른 듯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 결말 장면은 분명 감각적이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워낙 정리가 안 되다보니 마지막의 감동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 죽음조차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라두 대령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이정민
물론 특정한 뮤지컬 작품이 반드시 페미니즘적인 작품이어야 할 필요도, 정치적 올바름(PC)을 엄정하게 추구해야 할 의무도 없다.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설정을 두거나 캐릭터의 성격을 수동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인물도 아니고, 마타하리 아닌가. 그녀는 수많은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했으면서도 그 판타지에 자신이 갇히지 않았고, 그들이 자신을 멋대로 소비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그런 그녀를 고작 이런 식으로 재해석했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EMK뮤지컬은 이 작품을 통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수동적인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한국 창작뮤지컬 역량의 총집결인 것처럼 선전해서 해외에 내보내도 괜찮은 걸까. <모차르트!> 이수 캐스팅 논란 때 이미 불거진 것처럼, 이 제작사가 그다지 여성에 대한 고민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부디 재연 때는 하드웨어의 훌륭함을 보존한 채 내실 있는 소프트웨어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내각을 구성한 캐나다 총리의 말처럼, 지금은 2016년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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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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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파인 옷만 입으면 팜파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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