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는 건 배기사가 아니라 조태오다.
쇼박스
조태오가 무서워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 있다. 그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실무자가 해결해주고, 아버지가 해결해주고, 고문이 해결해주고, 청장이 해결해주는 탓이다. 그러니 '쫄릴' 게 없다. 어렸을 때 기억을 돌이켜보자. "어른 무서운 줄 알아야지"하면서 엄마한테 매를 맞았고, 선생님한테는 손바닥을 맞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나의 행동에 피해 받는 사람이 있었고 그 때마다 혼쭐이 났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워야 했기에 어느 순간부터 똥 싸기를 멈춰야했다.
쫄릴 게 없는 이들이 있다. 잘못을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러 드라마에서 쫄릴 게 없는 캐릭터들을 목격해왔다. 속칭 '싸가지'가 없는 사람들. 올해 종영한 SBS 드라마 <상류사회>의 재벌 3세 유창수(박형식)은 행실이 개차반답게 별명이 '개본부장'이다. SBS <상속자들>(2013)에서 최영도(김우빈)는 재계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제국고에 '사배자'(사회배려자)' 학생들이 불쾌해서 괴롭힌다.
2010년 종영한 SBS <시크릿가든>에서 주원(현빈)은 연인인 길라임(하지원)에게 "넌 그냥 내가 질릴 때까지 옆에 있다가 인어공주가 그랬듯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면 되는 거야"는 말까지 한다. 비슷하게는 KBS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가 있었고 그 전에는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의 정재민(조인성)이 그랬다. 그들은 경영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이 '싸가지'가 없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더 없이 로맨틱하던 드라마 속 재벌 3세들이 금탯줄도 능력임을 눈치 챈 즈음부터는 싸가지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던 건 적어도 '사랑'은 무서워했다는 것이다. '혼테크'(결혼+혼테크)를 운운하던 유창수는 이지이(임지연)의 이별통보에 아이처럼 꺼이꺼이 운다. 정재민은 사랑에게 버림받고 제 목숨을 버린다. 그토록 '사랑'은 간절한 가치다. 관계가 단절될까 두렵고, 상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까 무섭다. 그들에겐 '사랑'이 유독 그랬지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그렇게 불가항력적인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태오에겐 최소한의 두려움이 없다. 일처리가 잘못 되도 깍지를 끼고 엎드려서 '야구 빠따'를 맞는 건 사촌형 최 상무(유해진)이요, 감옥에 대신 가는 것도 사촌형이다. 만나던 여자가 임신을 해도 애를 떼어 버리면 그만이다. 자본이 모든 걸 지배하는 사회에서, 조태오에게 불가항력이란 없다.
그래서 제멋대로다. 그는 '어이가 없다'고 읊조리며 '어이'의 유래에 대해 일장연설까지 하지만, 심지어 그가 알고 있는 '어이'의 유래는, 실은 '어처구니'의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조태오는 어이와 어처구니를 구분할 이유가 없는 친구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끝까지 그게 맞는 거다"고 덧붙인다(<씨네21>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 어처구니를 찾아서' 중)
'영화적 상상력으로나 가능한 괴물'일까
▲눈치 안 보는 두 남자가 맞부딪히는 순간, 파열음은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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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위원은 <'베테랑'의 공식 "재벌은 악, 민노총은 선">이라는 칼럼에서 조태오가 '정말 영화적 상상력으로나 가능한 괴물'이라고 못 박았다. 안타깝지만 그의 말마따나 절대 없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 같진 않다.
<베테랑>과 직접적으로 닮아있는 이야기는 물류업체 M&M 최철원 대표 사례다. SK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현 회장의 조카인 그는 2010년 회사 인수합병 과정에서 고용승계를 해주지 않아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탱크로리 기사 유아무개씨를 회사 사무실로 불렀다. 야구방망이로 13차례 유씨를 때렸고 1000만 원짜리 수표 2장을 건냈다. 그리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뿐만이 아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2007년 3월 차남을 때린 서울 북창동 술집 종업원들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야구 방망이를 들었다.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의 차남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초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94년에는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장남인 고 신동학씨가 '건방지게 프라이드가 끼여들어 흘겨본다'는 이유로 프라이드 운전자와 동승자를 벽돌과 깨진 화분 등으로 내리친 일이 있었다. 그들이 돈이 있어도 냉소 받는 이유는 '돈'만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이 없다. 배려가 없다. 고민이 없다.
문제는 '범죄'보다 '범죄적' 재벌가다. 얼마 전 롯데 왕자의 난이 대표적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격호 롯데 전 총괄회장을 '오또상(아버지)'이라고 불렀다. 재계순위 5위 기업의 총수 일가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사용한 일은 가히 이례적이었다. 연간 83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한국롯데는 5조7000억 원(이상 2013년 기준)에 그친 일본롯데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무려 416개에 이르는 순환출자고리 덕분에 단 0.05%의 지분만으로도 계열사를 장악해왔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롯데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SK 본사 건물로 출근,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웃고 있다.
연합뉴스
어디 롯데 뿐만이랴. 지난해 2월 SK 최태원 회장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형으로 구속돼 재판중인 상태에 공개된 그의 연봉은 301억 원으로 국내 등기임원 연봉 1위를 차지했다. 올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사면 열흘 만에 박근혜 대통령 및 장관 및 도지사와 함께 SK하이닉스의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 '엠(M)14' 준공식 자리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죄를 지은 재벌 총수를 격려하고 기업은 그 대가로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는 풍경은 흡사 돈과 법치를 물물교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대놓고 때렸으면 같이 침이라도 뱉을 텐데, 이 '합법'은 어떻게 욕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황호택 논설위원은 <베테랑>의 재벌 3세가 '정말 영화적 상상력으로나 가능한 괴물'이라고 썼나 보다. 저렇게 허당이고 하수인 재벌 3세는 찾기 힘드니 말이다. 욕하기조차 어렵게 만든 자본은, 이제 법을 어기다 못해 법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
눈치가 없다면 쪽팔린 줄이라도 알자
▲감시의 눈은 때론 돈이나 주먹보다 무섭다.
쇼박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쪽팔리게 살진 말자."이 두 대사가 영화 <베테랑>과 한국 사회를 관통한다. '가오'를 챙기며 쪽팔리지 않게 살기야 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서도철과 조태오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비록 서도철이 "전세 대출 이자를 모으면 그 돈으로 집을 샀겠네"라고 궁시렁대는 사람일지라도 돈에 굴복하는 사람은 아니다. 비록 그가 눈치는 없을 진 모르지만 '가오'는 있다.
서도철뿐만 아니라 서도철의 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서도철의 아내(진경)은 루이비통 가방 안에 든 5만 원 다발로 회유하는 최 상무를 무안까지 주며 거절한다. 그녀가 정말로 쪽팔린 건 그 돈에 흔들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정의롭기란 쉽지 않다. 난 그 장면에서 '저 돈을 받는다면 봐둔 왕십리 길목에 카페를 차리고…. 저 가방은 중고나라에 되팔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소리쳤지만 돈 없는 이들이 가오까지 챙기며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영화가 판타지적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지점이다. 내 정의와 관계없이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폐쇄적인 우리 사회에서 한낱 보잘 것 없는 나의 정의가 밝혀지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누구는 제 죄를 덮기 위해 인맥과 자금력을 동원해 경찰과 검찰을 회유하고 광고로 언론을 옥죄는데, 내가 가진 쥐뿔은 뭐란 말이냐. 그들은 위로금을 운운하고 외려 상대를 "어이가 없다"고 나무란다. 최소한의 내 정의조차 장담할 수 없기에 그에 맞서는 누군가를 우리가 꿈꾸기는 어렵다. 타인의 불편부당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서도철이 판타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지점이다.
돈의 무게를 이기는 정의가 이젠 꿈같은 소리가 되어버렸지만 꿈을 욕할 순 없다. 우리가 돌을 던져야 할 상대는 '꿈꾸는 이'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꿈꾸는 소리로 만들어버린 이들'이다.
돈은 없고, 얼굴은 그저 그렇고, 누구 멱살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내가 택하는 최소한의 도덕률인 셈이다. 설사 서도철처럼 목소리를 내진 못하더라도 기억하고 응원할 것이다. 명동 대로변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조태오에게 맞는 서도철을 찍는 CCTV 카메라와 폰카처럼. 아트박스 사장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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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보고 어이없어야 했는데...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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