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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짧은 치마 불허... 영화계에 닥친 '유신'

[영화로 세상읽기18]포스터가 재난이 된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

14.02.25 17:23최종업데이트14.02.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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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0일 개봉한 할리우드블록버스터 <폼페이: 최후의 날>(아래 <폼페이>)은 개봉 첫 주 5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 달 동안 왕좌를 굳게 지키고 있던 <겨울왕국>을 밀어내고 주말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반면 북미에서는 첫 주말 고작(?) 1001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기록하며 3위를 차지해 흥행전선에 적신호가 켜졌다. 1억 달러의 제작비를 고려하면 한국에서의 순조로운 흥행에도 <폼페이>는 제작자들에게 화산 폭발만큼 위협적인 상업적 재난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등위는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폼페이> 포스터를 반려했다
▲영등위는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폼페이> 포스터를 반려했다 D&C엔터테인먼트

화산 폭발보다 위험한 키스

한국에서 <폼페이>는 영화보다 포스터가 더 화제가 됐다. 영상물등급위원회(아래 영등위)가 애초 <폼페이>의 포스터를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반려했기 때문이다. 배급사 측은 '검열' 때문에 폭발하는 베수비오 화산을 배경으로 남녀 주인공이 키스하는 장면의 포스터를 서로 마주보는 장면으로 바꿨다.

물론 격렬하게 폭발하는 화산을 성적 은유로 해석하면 다소 선정적인 포스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산 폭발을 성적 은유로 해석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영등위의 생각처럼 많지 않다.

이제 키스장면은 TV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장면이다. <폼페이>의 키스장면보다 훨씬 더 민망한 장면들을 언제든지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다.

영등위는 <관능의 법칙>의 포스터도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반려한 바 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중년여성들의 치마가 너무 짧다는 이유였다. 결국 제작진은 CG로 치마의 길이를 늘려 검열을 통과했다. 키스 장면과 중년 여성들의 치마 길이까지 단속하는 영등위의 과잉 검열은 마치 유신시대의 영화 검열을 떠오르게 한다.

1970년대는 한국 영화의 암흑기였다. 1960년대까지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들을 생산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명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한국 영화의 몰락은 1980년대까지 지속됐다. 한국 영화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군사정권의 검열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의 공식 출범 이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퇴폐·문란 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 아래 반사회적·반민족적 '저질영화'들을 난도질했다.

검열과의 전쟁: '저질영화'의 전성시대

1973년 '유신영화법'이라고 일컫는 영화법 제4차 개정으로 영화진흥공사가 신설되고 검열이 크게 강화되었다. 1975년에는 영화 시나리오의 심의가 문화공보부에 사전 보고되도록 하는 이른바 '정화 지침'이 발표됐다. 1976년에는 공연윤리위원회가 만들어져 행정기관이 영화 검열에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검열 강화로 시나리오의 심의 반려 비율은 1970년 3.7%에서 1971년 25%, 1975년 80%로 급증했다. 검열에서 살아남은 영화가 거의 없는 셈이다.

퇴폐, 저질문화 일소는 명분일 뿐 검열의 칼날은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에 집중됐다. 예컨대 1965년 이만희 감독의 <7인 여포로>에는 한국군 간호장교를 겁탈하려는 중국군을 북한 장교가 물리치자 간호장교가 "멋있는 행동이었어요"라고 답례하는 장면을 나온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단지 북한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이만희 감독을 40일 동안 구금했다.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966년 <군번 없는 용사>라는 반공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문제가 됐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신성일을 북한군으로 출연시켰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는 "저렇게 잘생긴 배우를 북한군으로 캐스팅한 의도가 무엇이냐"며 이만희 감독을 추궁했다고 한다. 이만희 감독은 1973년 영화진흥위원회 설립 기념작으로 <들국화는 피었는데>라는 국책영화를 만들었지만 이조차 지나친 검열로 편집권을 포기하고 결국 영화 활동을 중단했다.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1970년 한국 영화의 걸작 <바보들의 행진>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1970년 한국 영화의 걸작 <바보들의 행진> 화천공사
1970년대 한국 영화의 걸작 중에 하나인 하길종 감독의 1975년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 때문에 망신창이가 되었다. 이미 시나리오 단계부터 검열로 누더기가 된 이 작품은 완성 후에도 무려 30분이나 잘려 나갔다. 송창식이 작곡한 주제가 <고래사냥>은 금지곡이 되었고 원작자인 최인호 작가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래'의 의미를 설명(?)해야 했다.

극도로 억압된 검열체제 하에서 영화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정부에서 장려하는 반공영화나 문예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충무로에서는 '저질영화'들이 양산되었고 영화 관객은 급속히 감소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600개가 넘었던 상영관은 1970년 중반 이후 500여개로 감소했다. 해외에서의 명성도 먼 과거의 영광이 되고 말았다.

유신시대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발, 미니스커트, 대마초 등 이른바 '퇴폐풍조'에 대한 검열과 금지, 단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억압을 은폐하기 위한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검열과 금지, 단속의 칼날은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 영등위는 키스와 짧은 치마 등 '퇴폐' 포스터를 검열하고 있지만 이것이 언제 정치검열로 확대될지 모른다. 적어도 영등위의 과잉 검열은 영화제작자들과 작가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은연중에 '자기검열'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적인 창작 분위기는 유신의 재림과 함께 '저질영화'의 전성시대도 부활시킬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나홀로연구소> http://blog.naver.com/silchun615 에 중복 게재됩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바보들의 행진 영등위 검열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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