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홍명보호, 4골차 패배는 값비싼 '월드컵 수업료'

14.01.31 12:50최종업데이트14.01.31 12:50
원고료로 응원
월드컵은 결코 아무나 갈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홍명보 감독에게도,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도, 아프지만 좋은 자극제가 되었을 '월드컵 모의고사'였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은 30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알라모돔에서 열리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 0-4로 참패했다. 3일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1-0으로 승리했던 한국은 북중미 전통의 강호 멕시코를 상대로 전후반 각각 2골씩 내주며 무기력한 완패를 당했다.

살벌했던 가상 월드컵 체험. '어서와, 사대영은 처음이지?'

단순히 평가전 한 경기의 패배보다는 5개월 뒤 열리는 월드컵에서 벌어질 수있는 상황에 대한 '가상체험'을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브라질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장기 해외전훈과 A매치 3연전 일정은 모두 사실상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를 가상으로 한 시뮬레이션으로 짜여져 있다.

국제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국내파와 J리그 위주로 짜여진 선수단에게 긴 이동시간과 익숙하지 않은 기후 및 시차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강호들과 3~4일 단위로 원정에서 잇달아 맞붙는다는 점 등이 어떤 압박으로 다가오는지를 구체적으로 뼈저리게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정신 차리지않으면 바로 5개월 뒤 월드컵에서 이런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야말로 멕시코에 4골이나 내준 대가로 얻은 교훈이었다.

평가전이지만 참패가 물론 달가울 리는 없다. 하지만 이 한 경기만 볼 것이 아니라 월드컵을 대비하는 대장정의 일부분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 역시도 한번쯤은 거쳐야할 과정인지 모른다. 냉정히 말하면 홍명보호는 그동안 온실 안 화초와도 같았다. 평탄한 환경에서의 생존방식에서만 익숙해진 이들이 비바람이 치는 야전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면역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는 선수들만이 아니라 홍명보 감독 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홍명보호는 그동안 제대로 된 원정경험이 거의 없었다. 지난해 7월 출범 이후 초반 4개월간 9경기 연속 A매치를 홈경기로만 치렀고, 첫 원정이 2013년 마지막 평가전이던 11월 러시아전(1-2)이었다. 새해 첫 경기였던 코스타리카전이 친선전임에도 상대 선수가 두 명이나 퇴장당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제대로 된 월드컵 강호와 만난 러시아와 멕시코를 상대로는 모두 졌다. 홍명보호는 홈에서 3승 3무 3패, 원정에서 1승 2패를 기록중이다.

아시아 라이벌 일본의 경우,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스컵(아시안컵 우승팀 자격) 출전을 제외하고도 A매치의 절반 이상을 원정경기로 치렀고 네덜란드-벨기에 같은 강호들과도 대등한 승부를 벌이며 맷집을 키운 것과는 분명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또한 4골차 패배는 홍명보 감독 부임 이후로는 처음이다. 홍명보 감독은 올림픽팀을 지휘하던 2012 런던올림픽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0-3으로 패한 것이 종전 개인 최다점수차 패배였다. A대표팀 부임 이후에는 한 경기 2실점이 최다였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이후 안정된 수비축구를 트레이드 마크로 해온 홍명보 감독으로서도 생소한 경험이었을 게 분명하다.

패배는 승부사들의 통과의례... 중요한건 패배 '그 이후'

평가전에서의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세계적인 감독들도 때로는 축구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패배는 있기 마련이다. 많이 이겨본 감독들은 그만큼의 패배를 자양분 삼아 승리의 노하우를 축적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4년 전 남아공월드컵을 이끌었던 허정무 감독만 해도 2012년 2월 동아시아대회에서 중국에 0-3으로 완패하며 곤경에 놓인 적이 있다. 유럽파 없이 국내파와 J리거들 위주로 구성된 선수단이나 월드컵 본선을 약 4개월앞둔 시기 등 당시 상황이 모든 면에서 멕시코전 이후 홍명보호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상대가 이전까지 단 한번도 져본일이 없던 중국을 상대로 세골차의 완패를 당했다는 점에서 허정무 감독에 대한 비난여론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험악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이후 일본과의 단두대 매치(3-1)를 승리로 이끌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고, 기세를 몰아 남아공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진출이라는 업적을 세웠다. 당시 허정무 감독이 어떻게 흔들리던 팀분위기를 다잡았는지에 주목할 만하다. 중국전 완패 이후 이튿날 허정무 감독은 주눅들어있는 분위기의 선수단을 질타하는 대신, 한 자리에 모여서 음악을 들으며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중국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 일부 수비수들은 결국 허 감독의 뚝심과 신뢰 속에 월드컵까지 동행했고 본선에서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했다.

한국축구 사상 월드컵 최대의 성공을 이끌어낸 히딩크 감독은 지도자의 역할에 대하여 이런 명언을 남긴 바 있다.

"경기에 이겼을 때는 감독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경기에 패했을 때 그때야말로 감독의 역할이 시작된다."

2002 한일월드컵을 1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이었다. 프랑스-체코 등 강호들에게 줄줄이 5골차 참패를 당하며 히딩크 감독에 대한 비난여론이 하늘을 찌를 때가 있었다. 심지어 월드컵 본선을 4개월 앞둔 북중미 골드컵에서도 부진하며 경질설까지 흘러나왔지만 히딩크 감독은 흔들리지않았다.

국내 전문가들의 분석과는 달리 한국대표팀의 최대약점이 체력에 있다고 판단한 히딩크 감독은, 철저히 월드컵 본선에 초첨을 맞춘 체력강화 프로그램을 꾸준히 밀어붙였고 이는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월드컵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또한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에서 크게 대패한 이후에도 이튿날 훈련장에 나와서 선수들과 웃고 장난치며 분위기를 주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경기에서 벌어진 선수의 실수를 지적할 때는 항상 잘한 부분을 먼저 칭찬하고 나중에 핵심적인 부분만 지적한 뒤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당시 평가전에서 유독 부진했던 선수 중 하나가 바로 김남일이었는데, 히딩크 감독은 잦은 실수를 저지르던 김남일을 끝까지 교체하지 않고 중용했다. 거듭되는 실수에서 주눅들지않고 배짱있게 웃어넘기던 김남일의 정신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훗날 김남일은 월드컵 본선에서 상대 에이스들을 봉쇄하는 '진공청소기'로 거듭났다.

'감독 홍명보'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

물론 히딩크나 허정무 감독이 성공했다고 홍명보 감독도 월드컵 본선에서 똑같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막연한 기대감보다 중요한 것은 홍명보 감독도 한번쯤 이런 경험을 겪으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축적해야 한다는 점이다. 홍 감독은 아직 히딩크-허정무 감독 같은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아니다. 현역시절 아무리 월드컵 4회 출전의 베테랑이라도 감독으로서 나가는 월드컵은 또 다르기 때문이다.

멕시코전의 숙제는 어차피 해법이 이미 나와있다. 평가전을 통하여 국내파 선수들 중에 월드컵에서 통할 만한 선수와 그렇지못한 선수들의 옥석이 가려지고 있다. 현재 부족한 부분은 유럽파라는 대안이 있다. 하지만 선수는 바꿀 수 있어도 감독은 5개월 뒤에도 여전히 똑같을 것이다. 몇 달 사이에 선수들의 기량이 갑자기 확 달라지기는 어렵다. 결국 같은 조건이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감독의 역량이 미세한 차이를 좌우한다.

사실 멕시코전에서 드러난 문제점의 키를 쥐고있는 것은 결국 홍명보 감독이다. 선수들의 기량부족이나 실점상황에서의 집중력 부족은 반복훈련과 경쟁구도를 통하여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경기운영적 측면은 결국 감독의 경험과 노하우에 비례한다.

멕시코전에서 홍감독의 경기운영은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홍명보호에서 최근 좋은 모습을 보여준 김신욱이 멕시코전 전반 또다시 '헤딩노예'로 회귀한 장면이나, 실점 상황에서 공격운영 등 교체카드를 통한 전술 변화를 효과적으로 주지못한 것은 홍감독이 책임져야할 부분이다. 경기는 선수들이 하지만, 그 선수들이 약속된 움직임을 수행할 수있도록 통제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다.

무엇보다 지금부터 지켜봐야할 것은 멕시코전 이후 홍 감독이 선수단 내의 패배의식을 얼마나 빨리 떨쳐내고 정상궤도로 되돌려놓을 수 있느냐다. 멕시코전 부진으로 자신감을 잃은 선수들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월드컵이 멀어졌다 싶어서 초조한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유럽파가 가세한다고 해도 월드컵은 유럽파만으로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홍명보 감독이 국내파 선수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선수들이 의욕을 태울 수 있다. 어쩌면 이번 패배 이후야말로 홍명보 감독의 진정한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 될지 모른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홍명보 감독 역시 월드컵이라는 무대에 나가기 위한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