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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으로 가득찬 '야왕', 복수의 끝은 얼마나 허망할까

[드라마리뷰] SBS '야왕', 하류와 주다해 사이 욕망의 흐름…그 끝은 어디?

13.03.13 14:03최종업데이트13.03.1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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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왕>의 두 주인공인 권상우와 수애
<야왕>의 두 주인공인 권상우와 수애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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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막장'으로서의 드라마

<야왕>에서 시청자가 아니 우리가 몰입하게 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선악의 이분법적 도식을 따르는 가운데, 악한 주다해가 저지르는 죄는 끊임없이 무한하게 증가하고, 그에게 복수의 칼날을 내놓는 하류의 고통과 분노는 마찬가지로 그만큼 증가하는, 결코 그 욕망도 복수도 브레이크 없이 탈주하는 일종의 막장 드라마로 정의할 수 있을까.

'갱도의 막다른 곳', 막장이라는 스타일로 점철된 드라마. 부연하자면 여기서 막장은 작품성의 측면이라기보다는 이 작품의 '빠른 전개'라는 형식이자 '치달을 곳 없는 욕망과 복수'라는 내용이 결합된 <야왕>의 스타일 자체를 말한다.

우리는 가령 주다해(수애 분)악하다는 것을 알고, 증오한다. 똑같이 하류(권상우 분)가 복수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는 것 역시 알고, 공감한다. 반면 여기서 '권선징악의 최후 결과'라는 해피엔딩을 반드시 예고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주다해를 좇는 하류의 입장에서 동화되어 본다고 가정하는 한에서, 그 시청자의 분노는 무력했다.

곧 하류가 아무리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주다해를 궁지에 몰아도 주다해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공식을 따르는 양, 성공(?)으로 향하는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 성공이라는 부분이 대통령과 등가 되는 영부인의 지위까지는 적어도 가져갈 것임은 이미 1화에서 제시됐다.

어떤 '극점'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적어도 하류의 제동이 주다해가 영부인에 오르는 과정까지는 적어도 무기력함을 일러주고 있다. 이미 지난 18회에서 대통령에 유력한 듯한 후보자로 오른 석태일(정호빈 분)의 옆에 비친 모습으로, 주다해는 그 청사진에 한발 다가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BS 월화드라마 <야왕>의 주다해(수애 분)
SBS 월화드라마 <야왕>의 주다해(수애 분)SBS

결말에서부터 시작된 드라마, 어디가 끝인가?

이 드라마는 앞선 극점, 다시 말하자면 출구가 없는 끝, 막장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아마 그 극점은 주다해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임계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그 극점에 가는 순간까지 줄기차게 하류 역시 성장(?)했다. 유망한 변호사의 옷을 입고 대기업인 백학 그룹의 고문 변호사가 됐다. 또한 회장의 장녀인 백도경(김성령 분)의 연인이 됐으며 생면부지의 아버지를 얻었다. 사실 그의 제동들은 성공적이었다. 오로지 주다해가 그것에 상관없이 또 다른 길을 계속해서 만들었을 뿐이다.

만약 우리의 시선이 동화되는 곳이 주다해가 아닌 하류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하류의 최종적인 복수, 곧 '완벽한 하나의 제동'은 분명 성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계속해서 하류의 제동에도 영부인이라는 극점에서 주다해가 계속 머물러 있다면, 드라마는 이른바 주체 없는 텅 빈 자리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흐름은 어디를 향하는가

사실 주다해의 욕망이 사회가 가리키는 매우 상징적인 자리의 최고점을 단순하게 향한다는 점에서 영부인의 자리는 그 욕망에 매우 적합하다. 바꿔 말하면 이 극점이 더 높은 곳을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된다. 극점은 항상 하강만을 남겨 놓는 것이다.

여기서 주다해의 욕망은 '여기보다(는) 더 높은 곳'을 향한다. 그의 모습에는 남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그것을 이용해 도약의 발판을 만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팜므파탈로서의 상이 겹치는데,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욕망의 끊이지 않는 흐름 자체(이는 곧 주다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순전한 욕망을 갖지 못한 자인 하류의 비극을 대조하며 진행해왔다. 이에 따라 제동 없는 욕망의 비극적 추락과 또 한편으로 자신의 욕망을 갖지 못했던 남자의 허망한 비극적 현실로 이어짐을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다해의 욕망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본다면, 똑같은 물음을 하류에게 던질 수는 없을까. 왜 그는 복수가 삶의 모든 것일까, 곧 악을 공권력에 순전히 넘기지 못할까.

 SBS 월화드라마 <야왕>의 한 장면
SBS 월화드라마 <야왕>의 한 장면SBS

어둠에서 또 다른 어둠으로

주다해는 죽음 내지 어둠에서 태어났다. 곧 어머니라는 죽음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음에서 시작해야 하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래서 그는 처절하게 빛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반면 하류는 이 어둠을 빛으로 바꿔주며 자신은 늘 어둠의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하류는 자신을 희생하여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 자체를 욕망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류의 복수는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사실 하류의 행위는 주다해의 어둠을 빛으로 바꿨던 것과 같이, 주다해가 새롭게 만든 어둠을 다시 지우려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실 그는 딸의 죽음 그리고 생면부지 형의 죽음에 눈물짓고 또 적개심을 갖고 이로부터 자신의 복수로서의 동인을 얻는 듯하지만, 거기에는 주다해의 어둠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을 착오적으로 꿈꾼다. '다 되돌려 놓겠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그 가난했던 그 자리야'라는 식의 말을 주다해에게 건네는 가운데.

그렇다면 복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단지 주다해를 완전히 추락시키는 것일까. 이는 단순히 결과로서의 통쾌함과 연결된다기보다, 근본적으로 그 스스로가 자신의 죄에 완전히 저당 잡혀 그 스스로 절망을 겪을 때일 것이다. 곧 욕망의 흐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대신 욕망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때일 것이다.

지금의 그 말대로라면 "사방이 적"이라는 주다해를 향한 여러 제동은 그를 욕망의 실현이라는 또 다른 발판을 만드는 계기인 동시에, 시련을 겪고 한층 더 단단하고 날카로워진 칼을 지닌 존재만을 만들 뿐이다. 곧 그 욕망의 흐름을 단절하지 못한다.

 SBS 월화드라마 <야왕>의 하류(권상우 분)
SBS 월화드라마 <야왕>의 하류(권상우 분)SBS

'야왕'이란 누구일까

어둠에서 태어난 주다해와 어둠에서 빛의 출구를 열어줬던 하류는 실상 하나의 탄생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드라마가 둘의 대립점을 끊임없이 갖고 가는 것과 동시에, 이 둘이 시작과 끝 역시 함께 할 것임을 예상한다. 주다해와 하류는 곧 누구 한 명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희생들을 감내했던 하류, 그리고 현실로 발을 내딛는 희망의 존재가 됐던 주다해. 반면 주다해가 그를 배반했을 때 주다해는 야망의 한 전환점을 구축했고, 하류는 복수 주체인 '야왕'을 향하게 됐던 것이다. 주다해의 시작을 열었던 것이 하류라면 지금의 하류를 만든 것은 주다해다.

매우 역설적인 두 관계는 곧 애초의 어둠에 도달하지 않을까. 굳이 원작의 인터넷상 떠도는 결말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마지막으로 다시 질문을 던지자면 '야왕'이란 누구일까.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는 <아이리스>에도 언급됐던 니체의 말은 실상 <야왕>에 더 적합하다. 복수를 하며 이미 복수 외에 생각할 수 없게 자신을 옭아매는 것으로, 하류는 이미 괴물이 된 것이 아닐까. 

곧 자각하지 못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하류는 단지 소박하고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픈 욕망이 좌절된 이후, 실상 자기 욕망의 실현이 복수의 과정에는 전혀 없었다는 허망함을 깨닫는 것이 <야왕>의 예고된 결말이 아닐까. 또한 최고의 자리를 꿈꾼 주다해가 왕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의 승승장구의 빛 그 이면의 어둠을 직시하며 '야왕'이 된 하류가 복수 이후 남는 허망함 아닐까.

에필로그: 다시 읽는 <야왕>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다시 읽기가 수행되어야 한다. 막장 드라마 같은 빠른 속도의 흡입력 대신, 욕망의 추락과 다른 한편으로 욕망 내지는 허망함의 자리를 보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지에 대해. 그래서 이 드라마는 중후반의 지점을 찍는 가운데, '진정한 추락'의 비극을 향하고 있음에 점점 더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류의 복수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가운데, 수애의 성공은 우리의 그와 같은 욕망을 가속화한다. 반면 하류의 허망함을 목도하기 전에, 수애의 허망함 내지 비극적인 내면은 복수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아니 복수로는 성취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한편 복수가 곧 하류의 행복을 이끌지 않으리라는 것, 오히려 비극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여기에 <야왕>의 딜레마, 그리고 초점이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아트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야왕 권상우 수애 주다해 하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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