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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통일이거나

[영화를 읽다] <베를린>

13.02.19 16:45최종업데이트13.02.19 16:45
일방통행인 남북문제를 다루기 위해 제3의 공간이나 사이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분단에 관한 탁월한 알레고리 영화 <풍산개>(감독 전재홍, 2011년)의 주요 공간은 그래서 비무장지대(DMZ)이다. 이 놀라운 상상력의 영화는 장대높이뛰기로 군사 경계선을 휙 넘고 질주해, 비무장지대를 탈주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베를린이다. 냉전의 열대였던 그곳이 불려나오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 아니다. 냉전과 탈냉전의 흔적이 거리에 새겨져 있는 그곳에 남한과 북한의 요원들이 주재한다. 베를린 그랜드 호텔은 남북한의 요원들 말고도 모사드와 CIA, 아랍계 무기상들로 붐빈다. 그런 설정이다. 베를린, 다국적 액션 영화의 전초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승부수를 두는 곳은 이념의 격전장이나 역사의 동요가 아니다. 말 그대로의 액션의 안무와 배우들의 연기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년)의 리얼 액션, 액션 키드로서의 류승완 감독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강조점이다.

영화에서 북한 영웅이자,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고스트'인 표종성(하정우)은 하정우라는 배우로 인해 연쇄적 타자성을 갖는다. <황해>(2010년)라는 영화에서 하정우는 연변 출신의 조선족 역을 맡아 뼛골이 빠지도록 고생했다. 글로벌 시대, 하정우는 조선족, 북한 남성의 억양으로 친밀하면서도 적대적인 타자성을 연기한다.

<베를린>이 속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쉬리>(1998) 이후 영화 산업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IMF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의 문화적 형식이기도 하다. 이 블록버스터는 영화 영역을 떠나 "대박"이라는 표현에서처럼 흥행에 크게 성공하거나 큰돈을 번다는 일상적 쓰임새와 순순히 교통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투기 자본의 상징이자 일상적 욕망의 코드, 문화적 형식이 된다. 블록버스터화 된 현재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58.8%로, 2006년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한때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 한국 영화 점유율이 높은 것이 바람직한 지표였으나 , 이제는 관객수 1000만 명이 넘어가는 "한국" 영화만이 누리는 승자독식의 세계, 문화적 민족주의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두개의 문> <백야>등 독립 영화의 기상은 드높지만 이러한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지원금이 삭감된 채 얼마나 더 헤쳐나갈 수 있을지 염려된다.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때다.

 영화 <베를린>의 한 장면
영화 <베를린>의 한 장면(주)외유내강 제작, CJ엔터테인먼트 배급

<베를린>은 블록버스터 문화 형식으로 북한 공작원을 핵에 둔 다국적 액션을 꾸려나간다. 이 영화에서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 모사드, CIA, 아랍계 무기상 등이 모두 악당이다. 정의가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설정은 (세계관이라고 하기엔 미달인) '본 시리즈'를 비롯한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이기도 한데, <베를린>은 그것을 공유하면서도 "신파"의 어떤 면을 주입한다.

예의 표종성과 련정희(전지현)의 관계에서 신파가 약효를 낸다. 이 영화의 설정 값을 그대로 따르자면 사적 생활이 "공화국"의 공적 명령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는 상황에 독일 대사관의 통역관과 공작원인 북한 영웅인 부부가 놓여있다. 이들 부부의 이야기로 신파는 눈물샘으로 향한다.

련정희는 갓난 아기를 북한으로 보낸 후, 북한 대사관의 통역관으로 일하며 성접대를 해야 한다. 이것만도 굴욕적인 상황인데, 베를린을 수하에 넣으려는 동명수(류승범)의 음모로 국가를 배신한 인물로 몰리고, 남편 표정성으로부터도 의심받는다. 련정희와 표종성의 부부라는 사적 결합과 국가가 이들에게 명하는 공적 결합의 불가능한 절충이 사랑의 오인이 됨으로써, 깨달음이 늘 늦게 도착하는 신파의 눈물이 되는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이 영화 액션의 특징으로 지적했던 타격보다는 '충격', 어떻게 보면 맞는 사람의 뼈와 살이 부서지고 파열하는 자학적 몸의 고통으로 표출되는 액션의 임팩트를 하정우가 연기한다. 액션의 활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칼에 찔리고, 총 맞고, 구타당한 상처받은 몸의 우울, 자폐와 경계에 있는 자학을 미묘하게 보여준다. 액션 반/영웅의 무기력하진 않으나 멜랑콜리 한 무드, 그리고 예의 신파성은 현 남북한의 정치적 사산, 유산의 무의식적 투영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표종성 대신 젠더 정치 혹은 신파의 법칙 상 련정희가 죽임을 당하지만, 그 죽음은 통일이나 남북 화해를 위한 어떤 제스처도 아니다. <쉬리>보다 신파는 무뎌지고 혹은 현실 법칙에 근접하고, <JSA공동경비구역>에서 서로가 발견한 민족적 형제애는 희박해졌다. 죽거나 혹은 통일이거나의 절박함은 탈 냉전의 공간 베를린에 존재하지 않는다. 암호명은 '죽거나 혹은 블록버스터이거나'.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입니다.
* '영화를 읽다'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화요일에 게재합니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www.professornet.org)에도 함께 올라갑니다.
베를린 김소영 민교협 영화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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