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2012년, 용감한 SBS 드라마가 날린 돌직구들

현실 도피 아닌 직시용 드라마의 명장면,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비추다

12.12.30 12:11최종업데이트12.12.31 13:22
원고료로 응원
언론 자유의 퇴행과 함께 공영방송의 위기가 최고조에 다다랐던 2012년. 의외의 곳에서 돌직구 몇 개가 날아왔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허구성을 무기로 사회 문제를 고발한 드라마 판이다.

지난해 <시티헌터>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다루며 직격탄을 쏜 것에 이어 올해도 SBS는 날카로운 시선의 드라마 몇 편을 내놨다. 시사 프로그램 제작진에 대한 징계가 줄을 잇고 대선 기간 동안 편파 방송 논란까지 일었던 올 한해, 차라리 더 신랄했던 드라마들은 더 이상 현실 도피용 콘텐츠로만 기능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드라마를 완성하는 요소가 구린내 나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있기에 작품이 빛나는 상황,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낭만보다는 현실 직시를 권했던 드라마들의 명장면을 곱씹어본다.

SBS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장면 ⓒ SBS


<샐러리맨 초한지> - 드라마가 그린 해고 노동자, 천하그룹 보고 있나?

'코믹터치'를 표방했던 <샐러리맨 초한지>지만, 사회 문제를 꼬집을 때만큼은 진지했다. 천하그룹이라는 가상 대기업의 생리와 샐러리맨들의 애환을 그리면서도, 그 기저에서는 뉴스보다 훤하게 현실을 투영했다. 특히 지난 2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1000일을 맞을 즈음 이 드라마에서는 극의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 사측이 공장 폐쇄를 막으려는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공장의 회생 가능성을 믿고 투쟁에 동참했던 천하그룹 사원 유방(이범수 분)을 통해 드라마는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사실 "돈 못 벌어온다고 식구를 내다 버릴 수 없지 않느냐"는 유방의 일갈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낭만에 호소하는 넋두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보다 하고 싶었던 말은 천하그룹 상속녀 여치(정려원 분)의 입을 빌린 "공장 적자가 심한데 왜 임직원들 월급은 자꾸 올라?"라는 순진하지만 직접적인 질문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노동자들은 해고를 피할 길이 없었지만, 유방은 그 사람들을 모아 팽성실업을 만들었다. '팽 당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기업'이라는 회사명의 의미는 비록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위안 같은 것이었지만, 드라마 밖에서 수많은 노동자를 팽한 실제 '천하그룹'들에게는 조금이나마 뜨끔한 손가락질이 되었기를. 

SBS <추적자> 마지막 회에서 백홍석 앞에 죽은 딸의 환영이 나타난 장면 ⓒ SBS


<추적자> - 국가가 보호하지 못한 백홍석에 대한 위안 "아빠는 무죄야"

이 드라마의 총구는 첫 회부터 분명한 곳을 겨누고 있었다. 유명가수와 유력 대선후보의 아내가 저지른 뺑소니 교통사고에 딸을 잃은 아버지 백홍석(손현주 분)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법정을 향해 총을 쐈다. 그리고 딸 백수정을 죽음에 이르게 한 권력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와 마지막 회까지 지난한 싸움을 벌였다.

<추적자>의 원제는 <아버지의 전쟁>이었다. 영웅이 아닌 소시민에게 일어난 사건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개인의 분노를 공분으로 확장시켰다. 결국 수정의 죽음을 이용한 대선후보 강동윤(김상중 분)은 그를 낙선시키려는 시민들의 연대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백홍석이 아버지로서 바란 건 범인을 잡아주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딱 한 가지였다. 15년형을 선고 받은 그의 앞에 백수정의 환영이 나타나 "아빠는 무죄야"라고 미소 짓는 마지막 장면은 가장 묵직한 울림을 전했다.

개인의 권리가 짓밟히고, 사적인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백홍석을 위한 최대한의 위로이자 배려는 딸의 인정뿐이었을 것이다. 그의 최후 진술은 약자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국가에 대한 외침 같았다. "심신상실로 법정에 와서 총을 쐈으면 내가 이상한 거죠. 법은,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내가 이상한 놈이 되는 거잖아요. 저는 그때 정신도 맑고 정상이었습니다. 근데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SBS <드라마의 제왕>에서 남운형 국장(권해효 분)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장면. ⓒ SBS


<드라마의 제왕> - 이웃 공영방송사의 시청률 지상주의 꼬집기

<드라마의 제왕>은 드라마계의 '내부 고발자'와 같은 패기로 등장했다. 드라마 판에 종사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더러 있었지만, 간접광고(PPL)와 쪽대본이 만들어지는 상황,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성 전쟁 등 제작 상의 생리까지 까발린 적은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방송사로서 배제할 수 없는 시청률 문제 건드리기는 무엇보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극 중 남운형 드라마 국장(권해효 분)은 자신의 자리를 꿰찬 김 부국장이 낮은 시청률을 이유로 프로그램을 조기종영 시키자, 다시 돌아와 "정의 없는 힘은 그저 폭력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시청률 10% 이하라는 저조한 기록에 머물고 있는 <드라마의 제왕>으로서는 바른 말을 하면서도 속이 쓰렸을 지점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최근 공영방송 MBC가 내건 시청률 지상주의 때문이다. "시시껄렁한 작품 말고 자극적인 이슈가 될 작품을 가져오라"거나 "작품성이나 가능성, 그딴 게 광고 붙여주냐"는 김 부국장의 사고방식은 "시청률 1등 못하면 그만둘 각오"라고 밝혔던 김재철 MBC 사장의 다짐과 겹쳐 보인다. 이에 맞서 "시청자와의 약속을 그저 시청률에 의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도 되냐"고 비판하는 <드라마의 제왕>은 시청률 꼴찌로서 가장 용감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SBS 샐러리맨 초한지 추적자 드라마의 제왕 드라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