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시절 미르코 크로캅은 국내팬들 사이에서 '얼음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보다도 인기가 더 좋았다.프라이드
'불꽃 하이킥' 미르코 크로캅(37·크로아티아)은 정말이지 아주 우연하게 나의 눈에 들어왔다. 야구와 농구에 빠져 다른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어린 시절 격투기에 잠시 동안 깊이 매료된 적이 있었다.
WWF가 큰 인기를 끌던 그 시절, 헐크 호건, 얼티밋 워리어, 마초킹 랜디 새비지, 안드레 더 자이언트, 빅보스맨, 캐리 본 에릭, 티토 산타나, 밀리언 달러맨, 릭 마텔, 어스퀘이커, 히트맨, 스네이커 등 스타급 프로레슬러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필자를 포함해 주변 친구들의 큰 관심사 중 하나였고, 책자·비디오·게임 등을 통해 수없이 정보와 취미를 공감하고는 했었다.
인터넷이 거의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인기와 관심을 모았다는 것은 지금와서 생각하면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이후 프로레슬링은 이른바 스토리에 중점을 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이고 각본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고 큰 실망과 함께 관심 자체를 끊어버렸다.
성인이 된 후 케이블채널을 통해 K-1과 프라이드 등을 접하게 되었고, 프로레슬링과 달리 실전이 중심이 되어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쉬이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주요 경기를 할 때는 멍하니 시청도 했었지만 타 종목 스포츠가 다른 곳에서 방영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채널을 돌리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나이의 경기를 보았다. 크로아티아의 특수경찰 출신이라고 소개된 다부진 인상의 그를 자막에서는 '미르코 크로캅'이라고 소개했다. 그냥 '다부지게 생겼네' 그 정도가 첫인상의 전부였다. 잘생겼네 너무 멋지다 그런 생각은 처음에는 하지 않았다.
밥 샙(37·미국)이라는 엄청난 거구의 거친 파이팅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보여준 뒤 크로캅과의 경기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무심코 경기를 지켜보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순간 어느새 경기가 끝나버렸다. 아마 둘 사이에 경기가 펼쳐졌었나 보다.
경기를 보기 전까지는 머리를 빡빡 밀어 제친 험악한 인상의 흑인 덩치 밥 샙이 경기를 이겼을 것이라 짐작했다. 덩치 차이를 비롯 외모에서 풍기는 포스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리플레이 화면을 통해 지켜본 크로캅의 플레이는 말 그대로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빠른 밥 샙의 돌진을 놀라운 사이드 스탭으로 이리저리 피하더니 짧지만 강력한 펀치를 그의 얼굴에 꽂아버렸고 그 한방에 승부는 끝이 났다. 마치 거대한 흑곰을 날렵한 표범 한마리가 정확한 일격으로 무너뜨려 버린 느낌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밥 샙과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의 감동을 표현하는 크로캅, 그날의 경기에 묘한 느낌을 받은 나는 이후 크로캅의 지난 K-1 경기 등을 일부러 찾아보며 이 선수가 굉장히 화려한 발차기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던 중 프라이드 경기를 보게 되었고 언제나처럼 관심 없이 다른 곳을 시청하려던 순간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화면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아닌 크로캅이었다.
'잉? 왜 저 선수가 저기 있지…?' 아무리 격투기에 관심이 작았다지만 종합격투무대인 프라이드와 입식타격이 주가 되는 K-1은 구별할 수 있었다.
어쨌든 아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는 반가움(?)에 경기를 시청하게 되었고, 이왕이면 구면이라고 나에게 익숙한 크로캅을 무조건 응원하기 시작했다. 워낙 멋지게 경기를 잡아내는지라 응원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대부분의 상대선수들이 인상과 체구에서 더욱 강해 보였지만 크로캅은 이에 아랑곳없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하이킥이 머리에 적중되는 순간 엄청난 전율과 함께 경기는 거기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더욱더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내가 낯익어하고 좋아했던 크로캅이라는 선수가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팬이 엄청났다는 사실이다. 성적으로서 1인자는 아니었지만 '60억분의 1'로 불리던 '얼음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35·러시아)보다도 인기가 좋았던 것이 바로 크로캅이었다. 역시 사람들 눈은 은근히 비슷(?)했던 것일까.
물론 안타깝게도 현재의 크로캅은 그 위상이 바닥까지 추락한 상태다. 큰 기대를 모으고 UFC로 스카웃되었지만 나이로 인한 운동 능력의 상실로 인해 예전의 초인같은 움직임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젊은 강자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링과 함께 하다보니 선수 말년에 들어온 옥타곤 철장 역시 적응이 안됐다는 평가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안티 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찢어발기고 있다. 대부분이 같은 조건이면 국내나 동양선수보다는 서양파이터를 응원하는 취향의 이들에게는 '푸른 눈의 무사'로 동경 받는 크로캅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팬들은 크로캅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가 단순히 강해서만이 아닌 그의 인생 역정과 사람 자체까지도 같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나도 마찬가지다.
골수팬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렵다. 해당 선수가 잘 나갈 때는 감정이입으로 인해 나까지 뿌듯하고 자랑스럽지만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괜스레 마음이 축 처지고 같이 힘이 빠진다. 하지만 그맛에 스포츠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그것이 바로 스포츠가 주는 최고의 마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