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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도 자유·평등·박애를

[영화로 읽는 세상 이야기 ⑩] 잊혀진 식민지 역사 <영광의 날들>

09.12.25 19:20최종업데이트11.05.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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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하기 한 해 전인 1961년.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로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혁명가면서 제3세계 해방운동을 연구한 사회철학자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이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지성과 양심을 대변하던 알베르 카뮈와 장 폴 사르트르가 존경과 경외를 바쳤던 프란츠 파농입니다.

서른여섯 살의 파농이 백혈병으로 죽어가기 직전까지 제국주의의 식민지 억압과 학살에 맞서 이름 없이 쓰러져간 민중들의 투쟁을 기록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그가 1952년에 쓴 <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 함께 식민화가 지배당하는 이들의 정신을 어떻게 훼손하는지, 또 탈식민화 투쟁이 어떻게 훼손된 자아를 새롭게 창조하는지 밝혀주는 역저로 꼽히고 있습니다.

파농은 이 책에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인 식민지 민중들이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비록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열등감과 좌절을 치유하는 이 창조적 작업을 완수하기 전까지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담대하게 설파합니다. 마치 일제 식민지와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로 인해 오욕과 왜곡으로 점철되었던 우리네 근현대사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처럼 들려 못내 불편합니다.

아프리카 단일연합국을 건설하려던 극좌 흑인 지도자들과 말콤 X 등 미국의 블랙파워 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되면서 폭력적인 테러리스트로 매도되기도 했던 파농은 식민주의와 손잡은 인종주의가 한 민족의 정신에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제리에서 정신병원 의사로 일을 하며 온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의사로서 식민지 알제리의 상류층에 속하는 파농이었으나, 그도 피부가 검었기 때문입니다.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쓴 북아프리카인들의 2차 대전

'식민주의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등장케 한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처럼 검은 피부의 알제리 청년들이 하얀 가면을 뒤집어쓰고 독일군에 점령당한 '조국 프랑스'를 위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전쟁터 한복판에서 되묻게 하는 영화가 있으니 <영광의 날들(2006년작, 라시드 부샤렙 감독, DVD, 12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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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알제리의 한 시골마을. 사이드(자멜 드부즈)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프랑스 군에 자원입대하고, 신병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마르티네즈 중사(베르나르드 블랑칸)는 어머니가 북아프리카 출신이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하얀 가면을 뒤집어 쓴 직업군인입니다. 알제리 병사 중 유일하게 읽고 쓸 줄 아는 압델카데르 하사(사미 부아질라)는 식민지 출신도 전공만 세우면 장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로지 진급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기에 프랑스 여인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나 전선으로 떠난 뒤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편지검열에서 발송불가 판정을 받는 메사우드(로쉬디 젬)와 동생 결혼식을 위해 죽은 병사의 금니를 뽑는 것도 서슴지 않는 야시르(사미 나세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출신 토착민 출신 병사들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프랑스를 나치로부터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참전합니다.

이탈리아를 거쳐 노르망디와 동부전선을 거치며 이들 토착민 병사들은 자신들을 초개와 같이 희생해가면서 프랑스를 지켜냅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먹는 음식에서부터, 받는 편지, 종교, 진급, 휴가에 이르기까지 이들에 대한 차별과 조롱은 계속되고 압델카데르가 진급에서 밀려나자 프랑스 군인과 이들 사이의 불신과 갈등의 골은 더욱 깊게 패입니다. 결국 사이드를 비롯한 토착민 병사들은 정당한 권리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독일군 점령하의 알자스 마을에 침투해 독일군과 마지막 전투를 시작하는데….

독일군의 총알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는다

<영광의 날들>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한 북아프리카 23만 명의 병사와 8만 명에 이르는 알제리 병사들이 실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홥니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식의 영웅적 휴머니티나 싸구려 애국심과는 거리가 멉니다. 30만 명이 넘는 이들 토착민 병사들이 숱하게 숨져갔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으로부터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겪으며 역사의 뒤꼍으로 물러나야만 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불어 원제도 Indigenes 즉, 토착민들입니다.

훈련소를 거치고 알자스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까지 영화는 토착민 병사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자문케 합니다. 애초 이들은 이번 전쟁이 죽여야 할 적과 지켜야 할 전우와 조국이 분명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인들 대신 총알받이로 내몰린 끝에 압델카데르만이 유일하게 살아남고 나머지 전우들은 전멸한 알자스 전투에서조차 프랑스 국기를 꽂고 승리의 기념사진을 찍는 건 모두 프랑스 출신 군인들의 몫입니다.

영화에서 압델카데르가 프랑스 대위에게 내뱉는 다음의 말은 영화의 모든 걸 웅변해 줍니다. "우리는 같은 땅에서 같은 적을 두고 같이 싸우지만, 독일군의 총알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독일군의 총알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지만, 프랑스의 군복은 그들을 차별한다는 이 말은, 이 영화의 키워드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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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60년이 지난 뒤 노인이 된 압델카데르가 전우들의 무덤 앞에서 비석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며 흐느끼는 장면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파리의 어느 뒷골목 허름한 방에서 힘겹게 구두를 벗으며 침대에 걸터앉는 그의 섧디섧은 어깨를 비추며 자막을 올립니다. '1959년 유공자 연금동결법안이 통과됐다. 식민지 중 독립한 나라의 유공자들만 해당됐다. 오랜 재판 후 2002년 1월 국참사원은 국가에게 연금전액 지급을 명했다. 그러나 차기정부들은 지급기일을 미루고 있다.'  

종전 60년이 지났음에도 프랑스 군인들의 3분의 1에 불과한 퇴역연금으로 연명하는 그들이 단지 본토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책임과 의무가 없다는 프랑스 정부의 방침을 에둘러 비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검은 피부의 토착민 병사들이 사실상 하얀 피부를 지닌 백인들 간의 전쟁이던 제2차대전의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는 <라 마르세예즈>와 '아름다운 프랑스 국기를 지키기 위해, 식민지 땅에서 조국을 구하러 왔다'는 군가를 목 터지게 불렀건만, 승리의 샴페인은 백인들만이 터트리고 그들은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는 차가운 무덤 아래에서 망각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프랑스의 정책을 바꾼 한 편의 영화 <영광의 날들>

영화는 주요 장면을 흑백화면으로 시작했다 전쟁의 구름이 지나가면서 컬러로 바꾸는 독특한 촬영기법을 선보입니다. 마치 흑백화면일 때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누구나 평등하게 참전한 전쟁처럼 보이지만 컬러화면으로 바뀌면 감춰진 피부색인 제국과 식민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이.

알제리계 프랑인인 라시드 부샤렙 감독은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 "잊혀진 역사의 한 부분과 식민지 군인들에 대한 경의를 담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북 아프리카 후손들인 이 영화의 주연 배우들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식민의 역사를 자각하고 제작비 투자 유치와 홍보에 앞장서고 심지어 엑스트라조차 "이 영화에서 내가 왜 고생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다"라고 말한 그들의 진정성은 영화를 본 300만 프랑스인들의 고요한 분노와 맞물려 마침내 프랑스 정부를 움직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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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날들>을 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퇴역군인들에 대한 연금정책을 시행케 했기 때문입니다. 알제리에서 1년간 주둔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우파의 시라크가 이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는 알제리를 비롯해 식민지에서 자행한 만행의 역사가 프랑스에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고, 이 점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2006년 9월27일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군인들의 인권을 보상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 발표합니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8만 명의 토착민 군인들이 프랑스 퇴역 군인들과 동일한 연금과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뒤틀리고 거꾸로 선 역사바로세우기는 현재진행형

식민지 군인들의 잊혀진 역사를 증언하는 <영광의 날들>은 우리에게 각인된 기억이 과연 옳은지 되묻습니다. 교과서에 2차 대전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규정한 내용이 전부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 오지의 가장 격렬한 전투에서 토착민 병사로 대표되는 유색인종들의 거대한 희생을 빛바랜 역사의 책장에 파묻어 두는 것이 정당하냐고.
  
영화는 우리들에게도 묻습니다. 최근 일본 후생노동성이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 끌려가 미쓰비시중공업 등지에서 강제 노동을 했으나 임금을 받지 못하고 당시 가입했던 후생연금 관련 수당을 내놓으라는 행정처분을 낸 한국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청구자 1인당 99엔(약 1300원)씩 지급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근로정신대에 동원됐다 돌아온 지 64년만에, 1998년 '후생연금 탈퇴수당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한 지 11년만에 돌아온 유일한 보상금 1300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리고 영화는 우리네 역사에 대해 자문자답할 것을 요구합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박정희 정권에게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신 청구권 등 모든 문제를 소멸한다고 적은 '한일 협정'을 이유로 그동안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기 당시 피해자들의 보상금 청구를 모조리 거부해 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일본 정부 못지않게 일제강점기의 고난과 상처투성이 역사에 대해 입 다물고 눈 감은 채 버티기로 일관해 온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영광의 날들 알제리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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