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아련한 기억들, 돌아보면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린 그 곳, 그 길... 2000년 숫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며 금연을 결심했고 6개월 쯤을 지나 비로소 담배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때엔 나날이 달라지는 저 밑바닥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2001년 동아마라톤 하프코스에 아무런 준비없이 참가신청을 했습니다. 마라톤 코스 중간에 있던 집을 핑계삼아 힘들면 집으로 들어오지 하며 참가해서 잠실대교를 건너 올림픽공원까지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사정하며 걸었던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록과는 상관없이 그저 달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게으른 연습을 무기삼아 하프마라톤에 참가하다가 드디어 풀코스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보지 못했던 길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무게를 더했습니다. 연습을 부지런히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태생이 운동에 길들여진 것도 아니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전날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일어나 대회장인 잠실운동장으로 향하는 발길이 유난히도 무거웠습니다. 꼬리를 무는 사람들의 행렬을 지금도 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도저한 발자국을 이 지면에 올곧게 표현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형형색색의 기나긴 줄들을 좇아 후끈한 열기 아래에서 11월을 달구는 행렬에 동참했지만 여전한 속내의 두려움은 자꾸만 발자국을 뒤채게 만들었습니다. 화창하고 깊은 가을을 따라 기나긴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42.195km. 의사 친구 녀석은 인간이 그 조건으로 달리다보면 데이터 상으로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기록을 따지기 이전에 오로지 완주를 목표로 하고 출발선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절 앞서가는 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길가에서 응원해주는 사람들, 몇몇 실랑이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보지만 결국에 전 혼자였습니다. 거친 호흡소리를 담아내는 작은 몸을 이끌고 한 발자국씩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반환점이었습니다. 하프마라톤이었으면 골인지점이었을텐데 풀코스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력은 소진되어가고 무뎌지는 발자국에 조금씩 절망의 색채는 깊어갔습니다. '이대로 설까, 아니면 아파볼까, 걸어서라도 가볼까.' 수없이 많은 나약한 생각들은 그렇지 않아도 묵직한 제 발걸음을 자꾸만 잡아챘습니다. 마라톤과는 상관없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로지 다리를 통해 올라오는 피로를 조금이나마 늦게 전달받고 싶은 생각에 생전 들춰보지도 않았던 많은 사람들과 광경들을 되새김질하며 둔탁한 발자국 옮기다보니 30km후미였습니다. 피로와 무거운 다리에 찌든 제 보폭이 줄어들며서 그래도 걷지는 말고 완주하자고 내심 걸어놓았던 목표치를 자꾸만 넘보게 만드는 유혹의 그곳을 지나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은 뜻밖에도 환했습니다. 4시간에 가까워지는 고통의 레이스에서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던 그들의 표정이 이상한 오기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온갖 경려와 시끌한 입담, 그리고 경이로운 배려까지. 마지막 3km를 그 미묘한 웃음으로 길을 재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저와 함께했던 MP3도 비로소 접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3km를 20분 가까이 달렸지만 그래도 잠실운동장을 한바퀴 돌 때에는 온세상이 제 것이습니다. 그런 거 있죠?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고 오로지 저의 모습만 색채를 입고 움직이는 그런 환상을 맛보았습니다. 마지막에 손을 들었던 것같고 약간은 웃을 수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이로부터 3년이 흘렀고 그 뒤로 9번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어하고 그리고 대회 전날엔 뒤척입니다. 매번 대회에 갈 때마다 기록을 연연해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목표가 없진 않습니다. 편안하게 미소지으며 달리기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거리를 조금씩 늘여가는 것이 작지만 소중한 제 목표입니다. 올 하반기엔 10월 7일과 11월 4일에 각각 풀코스대회가 있습니다. 11월에 열리는 대회는 첫 풀코스대회였던 중앙마라톤입니다. 목표는 34km까지 편안하고 웃으며 달려보는 것입니다. 물론 기록이 받쳐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도 숫자에 불과한 기록보다는 처음 마주치면서도 거리낌없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많은 달림 친구들과의 만남을 곱게 쌓아가 보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