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재(수원 블루윙스)의 오른손 끝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연장전 끝날 때까지 68분 동안 열 명이 뛴 한국은 일본의 파상 공세를 잘 막아내며 3위를 차지해 2011년 아시안컵 본선 진출권을 쥐고 활짝 웃었다.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끌고 있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우리 시각으로 28일 밤 인도네시아 팔렘방에 있는 자카 바링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2007 3, 4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승부차기 끝에 6-5로 물리치고 3위에 올랐다.
문지기 이운재, 또 한 번 웃다!
지난 25일 밤 쿠알라룸푸르에서 이라크와 벌인 준결승 승부차기, 이라크의 세 번째 키커로 나온 하이다르의 오른발 슛에 이운재는 정확하게 반응했다. 중앙선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우리 선수들은 막았다고 좋아하며 뛰어올랐다. 하지만 곧 수그러들고 말았다. 이운재의 품에 안긴 줄 알았던 공은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던 겨드랑이 사이를 통과해버린 것이었다.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운재는 또 한 번 골 라인 위에 섰다. 한 대회에서 세 경기 연속 승부차기를 치르는 일이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다. 후반전에 바꿔 들어온 여섯 번째 키커 하뉴의 오른발 킥을 멋지게 막아내고 특유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우들이 달려와 안기는 그의 품은 정말로 듬직한 맏형의 그것이었다.
이운재의 품에서 나온 승리 예감은 11분, 엔도가 오른발로 감아찬 직접 프리킥 상황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선수들이 선 인간벽을 피해 휘어져 들어오는 공을 향해 이운재는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가슴으로 잘 막아낸 것. 전반 끝무렵에는 실점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놀라운 반사 신경을 자랑했다. 오른쪽 코너킥이 넘어와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 나카자와의 오른발에 정확하게 걸렸지만 이운재의 감각적인 오른손은 골 라인을 넘어서기 직전에 공으로 향했다. 바로 앞에서 찬 공에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73분에도 나카무라 슌스케의 연결을 받은 교체 멤버 하뉴가 회심의 왼발 슛을 시도했지만 이운재는 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하뉴의 슛을 쳐낸 다음 골잡이 다카하라에게 간 공을 따라 곧바로 몸을 내던졌다는 사실이다. 한 번 중심이 무너진 문지기가 다음 동작까지 완벽하게 해낸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들린 이운재 앞에서 일본 선수들은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연장전 28분, 또 다른 교체 멤버 사토의 왼발 돌려차기에 대해서도 이운재는 침착했다. 70분 가까이 열 명이 뛰며 그냥 주저앉을 것처럼 보였던 필드 플레이어들은 공을 끝까지 주시하며 잡아낸 맏형의 눈빛에서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하뉴의 UCC, 흥행 예감?
72분, 일본의 오심 감독은 나카무라 켄고를 빼고 JEF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의 미드필더 나오타케 하뉴를 들여보내며 공격적 주문을 걸었다. 열 명이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잔뜩 움츠리고 있으니 수비형 미드필더보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결승골을 터뜨릴 것처럼 인상적으로 움직였다. 왼발잡이 나카무라 슌스케의 자로 잰 듯한 찔러주기를 받아 우리 벌칙 구역 안에서 날카로운 왼발슛을 날렸다. 문지기 이운재는 놀라운 순발력을 자랑하며 이를 잘 쳐냈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하뉴는 승부차기 5-6으로 뒤진 상태에서 일본의 여섯 번째 키커로 나와 찬 오른발 슛이 이운재의 선방에 걸려 그대로 드러누워 슬퍼했다. 그 승부차기 실패보다도 몇 분 전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장전 25분,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이 한국의 골문 바로 앞에서 벌어졌다. 나카무라 슌스케의 날카로운 왼발 띄워주기가 우리 골문을 위협했는데, 여기서 흘러나온 공이 하뉴의 왼발에 걸렸다. 빈 골문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완벽한 득점 기회였다. 우리 축구팬들은 아마도 이 순간 '여기서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하뉴의 왼발을 떠난 공은 골문의 빈 공간을 내버려두고 모로 선 김치곤의 몸에 맞고 튕겨나갔다. 더구나 김치곤은 이를 막고자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고개를 떨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비운의 미드필더 하뉴의 이 아쉬운 장면은 아마도 UCC로 편집되어 여러 누리꾼들의 손끝을 통해 널리 퍼져나갈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포츠뉴스 핫 토픽 감이다.
나란히 관중석에 앉은 베어벡 감독과 홍명보 코치
진정한 맞수 대결은 56분에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기였다. 아랍에미리트 출신의 알 바드와위 주심은 일본 골잡이 다카하라에게 두 번째로 거친 반칙을 저지른 우리 수비수 강민수에게 빨간딱지를 치켜들었다.
이에 우리 선수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칙 상황이라면 강민수의 2차 충돌 직전에 벌어진 김진규와 다카하라의 높은 공 다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우리 벤치는 격분했다. 덕분에 돌아온 것은 빨간 딱지들이었다.
핌 베어벡 감독, 홍명보 코치, 문지기 코치 코사까지 관중석으로 쫓겨난 것. 승패의 갈림길에서 양보 없는 몸싸움을 벌여야 하는 가운데 수비수 한 명도 모자라 두뇌 싸움을 벌여야 하는 코칭 스태프까지 거의 빠진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열 명의 우리 선수들은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알 바드와위 주심은 연장전 9분,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을 내렸다. 놀라운 체력으로 오른쪽 옆줄을 오르내리며 활약한 오범석이 높게 떠오는 공을 향해 가슴을 내밀어 공을 떨어뜨린 다음, 빠른 역습을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에 주심의 휘슬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내민 팔에 공이 닿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고 하지만 너무한 일이었다. 블라터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까지 지켜보고 있는 아시아 최고 권위의 대회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경기 운영이었다.
90분 정규 시간만으로도 그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것이 맞수의 대결인데 이 경기는 많은 축구팬들에게 수많은 '덤'을 남겨주었다. '축구 역사상 보기 드문 세 경기 연속 연장-페널티킥 승부'도 모자라 '시간의 절반 이상을 열 명이 뛴 한국의 극적인 승리'라는 짜릿함까지 말이다. 7월의 마지막 일요일, 늦잠 잘 사람들 많겠다.
덧붙이는 글 | ※ AFC 아시안컵 2007 3, 4위 결정전 결과 / 28일, 인도네시아 팔렘방
★ 한국 0-0(승부차기 6-5) 일본
◎ 한국 선수들
FW : 염기훈(40분↔이근호), 조재진(87분-경고), 이천수
MF : 오장은(36분-경고/86분↔이호), 김두현(66분↔김치곤), 김정우
DF : 김치우, 김진규, 강민수(10분-경고/56분-퇴장), 오범석
GK : 이운재
◎ 일본 선수들
FW : 다카하라(연장25분↔야노), 야마기시(78분↔사토)
MF : 엔도, 나카무라 켄고(72분↔하뉴), 스즈키 케이타, 나카무라 슌스케
DF : 코마노, 아베 유키, 나카자와, 카지(연장16분-경고)
GK : 가와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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