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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첫 날 친척 동생과 함께 영화 <1번가의 기적>을 봤다. 그 전 주만 하더라도 무슨 영화를 볼까 망설였던 나였건만, <1번가의 기적> 개봉 이후 갈등은 사라졌다. 무엇이 나의 발걸음을 그 영화로 이끌었을까?
임창정과 하지원 커플? 낯익은 제목? 아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만들었던 감독에게 거는 기대? 어쨌든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1번가의 기적>을 선택했고, 지금까지도 스스로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이어지는 글은 그 만족의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 같다.
식상한 무대 철거촌, 알면서도 택한 까닭
 |  | | | ▲ 현재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영화 <1번가의 기적>. | | | ⓒ 두사부 필름 | <1번가의 기적>은 잔잔한 감동과 웃음을 선사하지만 어디서 한 번 쯤은 본 듯한, 결코 낯설지 않은 영화다. 가난과 행복이라는 주제도 주제지만 그 소재가 워낙에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철거촌이라는 공간과 권투라는 몸짓의 만남.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철거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철거촌은 이 시대 이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공간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얼레벌레 만들어졌던 주거공간에 대한 재개발은 수많은 철거촌을 양산해 내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소위 달동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수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에 철거촌이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그 많은 숫자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그곳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철거촌이란 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징성, 즉 개발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버린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철거촌을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철거촌은 단순히 가난의 상징이 아니다. 그곳은 이 시대의 욕망이 점철된 곳이자 생존의 본능이 새겨진 공간이다. 지지리도 못 사는 동네를 보며 자본가는 개발과 함께 그 지역에서 남길 잉여를 생각하며, 국가는 그 건설자본으로부터 얻을 권력과 돈을 꿈꾼다.
비록 그 대의로는 환경미화와 삶의 질이 거론되지만 정작 그곳에 터를 마련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없다. 따라서 탐욕스러운 자본과 국가와 함께 그 곳에 남겨지는 것은 결국 힘없는 민중의 생존본능이다. 거주의 권리를 외치며 거대자본과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생존을 지켜내고자 하는 힘없는 자의 외침이 철거촌에는 항상 공식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그 주체들의 갈등은 항상 폭력을 부르게 마련이다. 합법적이지만 결코 도덕적이지 못한 폭력이 철거촌에는 존재한다. 팔뚝에 문신을 새긴 용역 깡패들이 항상 도장을 찍으러 다니고 종국에는 각목을 들고 와서 마을 사람들과 한 판 싸움을 벌인다. 그 와중에 멀쩡한 집을 간단하게 부수고 마는 포클레인이 있다.
철거촌에 관련된 작품들이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이야기의 구조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거촌은 우리에게 식상할 만큼 익숙한 존재다.
배고픈 직업 1순위 복서를 내세운 까닭
 | | | ▲ 사각 링에서 부딪히는 몸짓. | | | ⓒ 두사부 필름 | | 철거촌과 함께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는 권투다. 영화 속 주인공의 표현대로 복싱이 아닌 권투. 권투는 결코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몸짓이다.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인물들의 처절한 몸짓.
권투는 철거촌과 마찬가지로 많은 영화들의 모티브가 되어왔다. 그것은 결코 권투라는 운동경기가 지니고 있는 재미 때문이 아니다. 최근 실베스타 스텔론이 <람보>가 아닌 <록키>로 돌아온 이유는 권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치열함, 사각 링이라는 갇혀진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벌어지는 그 원초적인 몸짓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서 홀로 싸우는 주인공. 넘어졌다가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고, 상대방에게 흠씬 얻어맞더라도 한 방을 노리며 끈질기게 버티는 주인공은 곧 나의 모습이며, 출구도 입구도 없는 사각 링은 우리에게 주어진 답답한 현실이다. 권투에는 결국 한정된 공간 속에서 그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고자 하는 우리들의 바람이 녹아있는 것이다.
게다가 권투가 지니는 정치사회적인 의미 역시 녹록하지 않다. 가난한 시절, 그러나 비교적 신분상승이 자유로웠던 그 시절 권투는 많은 이들에게 꿈이었다. 다른 운동경기와는 달리 권투는 엘리트 교육이 굳이 필요 없는, 맨주먹으로 하는 종목이었고 따라서 권투는 신분상승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결국 '헝그리 복서'는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시대,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모든 이들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이종격투기가 영화 속 권투를 대신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격투기는 몸짓보다 스포츠에, 스포츠보다 쇼에 가깝다. 격투기에는 권투가 지니고 있는 치열한 생존본능보다 돈을 향한 욕망이 짙게 배어있다. 최홍만을 보면서 열렬히 응원은 할 수 있지만, 홍수완의 경기를 보면서 느꼈던 감동을 얻기 어려운 것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이런 권투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권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상투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미 권투만으로도 많은 것을 상상하며 기대한다. 그것은 어려운 시절 끼니를 걸러가며 자아실현의 의지를 불태우는 주인공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내며, 혹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뻔하고 식상한 소재와 주제, 외면할 수 없는 까닭
 | | | ▲ 돈 놓고 돈 먹는 땅따먹기. 우리의 현실입니다. | | | ⓒ 두사부 필름 | | 그런데 영화 <1번가의 기적>은 이와 같이 상투적인 철거촌과 권투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그 뻔한 소재를 가지고 또 뻔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당연히 일말의 불안감이 존재할 수밖에. 아무리 배우가 출중하고 감독이 훌륭하다고 해도 상투적인 신파는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는 것이 현재 우리 관객의 수준 아니었던가.
하지만 현재 영화 <1번가의 기적>은 이와 같은 우려를 씻어 내고 보란 듯이 순항 중이다. 그 뻔한 소재에 뻔한 내용을 가지고서도 많은 이들의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과연 영화 <1번가의 기적>에는 무슨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기에 그 식상함을 이겨낸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영화가 가지고 있는 현실성, 즉 상투적이만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의 힘 때문이다.
물론 영화 속 철거촌을 마냥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철거촌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달동네들이 이미 사라졌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철거촌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진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철거민들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사라진 것은 결코 단순히 특종만 찾아 움직이는 언론의 무관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10년 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우리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다. 개발 이데올로기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아직까지 생존권을 외치고 있는 철거민들의 목소리를 삼켜버리고 있다. 영화 속 철거민들처럼 분신을 해야지만 언론에 고작 한 줄 실리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가지는 현실성은 바로 그 암묵적 합의에 동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편함과 큰 관련을 맺는다. 우리들은 영화를 보면서 무력한 철거민들에게 붉은 피를 튀어가며 폭력을 휘두르는 조폭들을 탓하지만, 동시에 그 철거촌이 사라진 곳에 예쁘장하게 지어진 아파트를 꿈꾸는 자신과 마주친다.
하늘 모르게 치솟는 강남 땅값을 욕하지만, 정작 자신이 사는 곳에 지하철이 들어서 땅값 오르기를 기도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개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우리는 영화 속 조폭과 공범이며 또한 그 고용인이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국가와 자본 그리고 중산층의 담합이라 하지 않았던가.
철거촌의 아이들을 거지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토마토를 던지는 아이들은 사회계층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을 이지매 시키는데 한 몫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함께 살아가는 방법 보다는 어떻게든 남을 밟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들.
그 무한경쟁을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모두에게 강요하는 이상 우리는 영화 속 철거민들에 대한 차별을 거둘 수 없다. 결국 영화의 현실성은 그 소재나 주제가 아니라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 담보하고 있으며 이는 영화 관람 내내 이유 모를 불편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 | ▲ 철거촌을 지키는 동심. | | | ⓒ 두사부 필름 | |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더욱더 많은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와 닿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그 아찔한 사회의 높은 가능성 때문이다.
현재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는 더더욱 벌어지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영화 속 철거촌은 남의 이야기로 치부되지만, 조금 가까운 미래에는 그 누구도 언제 그런 상황에 내몰리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영화의 내용은 다른 의미로서 현실성을 띤다. 그것은 비록 현재 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언제 나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 높은 극현실이다. 비정규직이 50%를 넘는 지금까지도 노동력의 유연성만 주술처럼 읊어댈 뿐 사회적 안정망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영화 속 철거민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화상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질퍽한 삶, 무엇이 희망인가
처절한 현실의 재현이 미안해서일까.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말미에 희망을 그려 놓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조잡한 게 사실이다. 어쩌면 감독 스스로가 현실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한국식 해피엔딩에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자들은 임창정의 교화를 이 영화의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전의 용역 깡패가 철거민들의 순박함으로 교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 영화 <비트>의 양아치를 연상시키는 임창정의 캐릭터는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없다.
자본은 결코 사람의 모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기의 발전이 전쟁을 게임처럼 만들었듯이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 체제 구성원들 간의 접근성을 극도로 제한시키며 삶을 가상의 공간에 가둬 놓는다. 체제 속에서 우리는 단지 재개발을 위해 돈을 투자할 뿐, 철거민들이 겪는 물리적 고통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 | | ▲ 단순한 파이팅만으로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 | | ⓒ 두사부 필름 | | 감독은 영화 말미 철거민들과 용역깡패들이 싸우는 그 순간에 꼬마 아이를 산으로 올려 보내 하늘을 날게 한다. 그것은 하지원이 뛰고 있던 좁은 사각 링으로부터의 비상이며, 철거촌으로 규정된 출구 없는 구조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러나 마냥 그 판타지를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결국 감독은 철거촌이라는 시대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내기보다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감독 하나의 문제겠냐마는 이 시대의 상상력 부족은 영화의 끝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비규환이 끝나고 덩그러니 남겨진 주인공들의 삶이 사족처럼 등장하는 그 장면. 하지원은 어느새 동양 챔피언으로서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거리며 다시 링 위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옆에서 1억 6천을 읊조리는 임창정.
물론 시끄럽다는 듯 하지원은 그를 밀쳐내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의미의 대사가 들리지만 1억 6천이라는 돈이 그녀의 고생을 보상해주고 있음을, 돈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다는 그녀의 행복을 그 돈이 탄탄히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행복의 표현마저도 돈으로 해야 속이 시원한 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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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2-28 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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