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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보면 알게 될 <싸움의 기술>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향연

05.12.30 15:22최종업데이트06.01.0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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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의 성장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폭력 즉 싸움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재이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 중 사회에 진입하기 전 단계인 학교안 경쟁은 대게 몸이 부딪히는 싸움에서 누가 승자가 되느냐에 달려있다. 신예 신한솔 감독의 <싸움의 기술>은 싸움을 어떻게 잘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이다.

병태(재희)는 공업 고등학교를 다니는 소위 '왕따'다. 학급 짱(싸움)과 그의 친구들에게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게 일상인 병태는 어떻게 하면 싸움을 잘 할 수 있을까를 고심한다. 그런 병태에게 혜성같이 싸움의 고수 판수(백윤식)이 등장하고 그에게 싸움의 기술을 전수받으려는 병태의 피나는 훈련이 시작된다.

 <싸움의 기술> 한 장면.
ⓒ (주)코리아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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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기술>에서 현실과 판타지는 가깝고도 먼 사이이다. 판타지는 남자라면 꿈꿀만한, 궁극적으로 싸움의 달인에 오르는 것이다. 병태는 <싸움을 잘 하는 법>이란 책을 보며 대결자세와 피하는 자세, 주위 사물을 활용하는 방법들을 익히고 그에 따른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동네 형과 도서관 주인이 가르쳐준 싸움의 이론은 완벽한 것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눈을 찌를 두 개의 손가락은 손등에 막히고 몽둥이로 쓸 형광등은 전등에서 쉽게 빠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 다음에는 날아오는 주먹을 몸소 품어야 하는 운명을 따라야 한다. 꿈속에서 상대에게 멋지게 박치기를 성공시키지 않는 한 병태의 얼굴에는 늘 거친 생채기만 남을 뿐이다.

그런 병태에게 판수의 등장은 가히 구원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병태의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가 갑자기 등장한 판수란 인물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판수와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왜 여권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영화는 세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오래된 도서관 책방에서 진귀한 책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어두운 현실에 있는 병태에게 싸움의 고수가 될 수 있는 희망을 선사하는 구원자이다. 거친 흰수염에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는 흡사 지팡이만 주어진다면 초야에 묻혀 사는 고수의 모습과도 다를 바 없다.

 <싸움의 기술> 한 장면.
ⓒ (주)코리아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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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판수를 세세하게 그려내는 것 대신 이 구원자와 같은 싸움고수가 비법을 전수하는 일상들을 소개한다. "싸움을 하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한다. 돈 많이 있냐"는 말로 예고편을 장식했던 것처럼 판수는 다소 엉뚱하지만 인상적인 대사들을 뿜어내며 싸움의 기술을 말해준다.

그래서 영화는 병태와 판수라는 두 인물을 중심에 두고서도 10대의 갈등이나 늙은 고수의 세심한 심리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팔을 꺾기 위해 빨래를 물기 하나 없이 짜야 하고 상대방의 심리를 간파하기 위해 광박과 피박의 심리전에서 이겨야 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싸움의 기술이 조금씩 전수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에피소드들은 소소한 웃음들을 만들어내지만 더 이상의 깊이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싸움의 기술>이 추구하는 영화의 방향이기도 하다.

<싸움의 기술>은 이전의 학원 소재 영화가 가지는, 사회와 연관된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제목 그대로 병태가 싸움의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싸움의 기술>이 아쉬운 점은 다른 한국성장영화가 가졌는 세대적인 공감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목적이 병태의 소원성취에 온전히 맞추어져 있기에 <말죽거리 잔혹사>가 가졌던 시대적인 억압의 대입이나, <비트>가 묘사했던 청소년의 앞날에 대한 불안한 서사가 드러나지 않는다. 판수가 "두려움을 이겨라"라고 말하는 대목이 인생의 두려움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이전 과정의 설명이 부족하다.

 <싸움의 기술> 한 장면.
ⓒ (주)코리아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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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싸움의 기술>은 매력적이다. 그것은 이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배우 백윤식이 가진 생생한 '아우라' 때문이다. 굳은 얼굴표정과 반쯤 감겨있는 눈으로 싸움의 본질을 꿰뚫는 사려 깊은 언변을 구사하고, 때로는 웃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맛깔스런 대사들을 뿜어낸다. <지구를 지켜라>의 판타지에 가까운 외계인과, 현실성이 강하면서도 속내를 드러냈던 <범죄의 재구성>의 악역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인물을 그는 매력적으로 만들어낸다. "너 자꾸 그러다가 피똥 싸고 기저귀 차고 다닌다"라는 말이 무척 위협적이면서도 재미있는 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변모의 페이소스 때문이다.

<싸움의 기술>은 싸움을 잘하려는 병태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 둘을 흡사 부자관계의 원형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형사일로 바쁜 병태의 아버지는 병태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지만 판수는 곤경에 빠진 병태를 구하고, 시종일관 세상을 달관한 웃음으로 병태에게 다가간다.

<싸움의 기술>이 다소 폭력적인 장면(19세 등급이었지만 자진삭제로 15세 등급을 받았다)들이 있음에도 훈훈한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은 판수와 병태가 나누는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진지한 이야기가 함께 묻어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1인 미디어 http://www.mediamob.co.kr/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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