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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가면 속에 숨은 알싸한 삶의 미학

[리뷰] <왕의 남자> 과거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다

05.12.30 09:08최종업데이트05.12.3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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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공길이 논어를 외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하였다. - 연산군일기 60권 22장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인간은 때때로 역사서에 쓰인 짧은 기록이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바탕으로 과거에 대한 새로운 상상, 그리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 기사에 관해 한중일의 역사학자들이 수십 년 가까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밀로스 포먼 감독이 궁정음악가 살리에르가 말년에 정신병원에서 언급한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를 통해 <아마데우스>라는 불멸의 명작을 연출했음을 생각해보자. 직접 겪어보지 않은 까마득한 옛날의 수수께끼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좋은 소재들이다. 광대,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단어다. 실제로 이들은 남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남을 웃긴다는 것,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노력과 눈물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우리로 하여금 통쾌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그들은 당대의 현실 속에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비애와 수난을 언급하며, 정곡을 찔러왔다. 양반들에게는 늘 천한 신분이라 무시당했지만, 그들 말고 누가 감히 높으신 양반들의 치부를 만인 앞에서 들춰낼 수 있겠는가? 탈 속에 얼굴을 감추며, 시대를 조롱하면서 민초들의 아픔을 시원하게 날릴 수 있는 웃음을 제공했던 그들이 드디어 탈을 벗었다. 이 시대의 서민들도 복잡한 정치 현실과 사회적 현실 속에서 늘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통쾌한 웃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광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탈 벗은 광대들, 과거와 현실의 정곡을 찌르다
 영화 <왕의 남자>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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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는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이 연출했다. 어린이 영화 <키드 캅>을 통해 데뷔한 이준익 감독은 긴 공백을 깨고 <황산벌>을 연출하며, '현실의 모순을 낱낱히 밝힐 수 있는 도구'라는 역사의 가장 완벽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온고지신'이다. 과거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며, 그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근본적인 이유다. 이준익 감독은 좁은 한반도 안에서 패권을 놓고 수백 년 넘게 공방전을 치렀던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을 통해 고질적인 지역 감정에 시달리는 우리의 현실을 재조명했던 감독이다. <황산벌>을 기억한다면, <왕의 남자>가 보일지도 모른다. <왕의 남자>는 연산군일기 60권 22장의 짧은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덧붙여 만들어진 김태웅의 연극 <爾(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조선왕조 500년>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숱한 사극의 주인공이었고, 주제 그 자체였던 연산군이기 때문에 어쩌면 다소 식상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왕의 남자>는 기존의 왕을 중심으로 하는 낡은 사관보다는 당시로서는 천한 신분이었던 '광대'라는 직업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입장에서 시대를 바라보며, 연산군의 시대를 재조명한다. 알고 보면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었던 사람은 없다. 악인이 만들어지는 데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과 현실이 큰 영향을 미친다. <왕의 남자>는 광대들이 왕궁에서 벌이는 한바탕 놀이를 통해 임금 연산군보다는 '인간 연산군'을 재조명하며, 그 시대의 정치 현실을 현재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치밀한 준비 정신이 엿보인다. <황산벌>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하다. 심지어는 저 광대들이 저러다가 목이라도 달아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다. 양반 사대부들에게 늘 '천한 신분'이라고 무시당하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광대가 존재하는 이유를 잊지 않았다. 하늘만큼 높다는 나랏님 앞에서도 그들은 결코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매섭게 저항한다. 인간은 때때로 불가능 앞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그 불가능의 극복을 위해 모든 것을 기울이기도 하는데, 광대는 그 당시 서민들이 가장 목말라하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대신 행사하며, 그들의 속을 시원하게 했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저항의 정신은 가장 필요한 정신이었던 셈이다. 광대와 '인간 연산군'을 통해 정치 현실을 풍자하다 역사 속에 기록된 연산군은 분명히 폭군이다. 하지만 그의 성장 배경 등의 인간적인 면을 돌아보면, 충분히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성장한 후에야 듣게 된 어머니의 이야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유품으로 남겼던 피묻은 한삼을 뒤늦게 손에 넣게 된 연산군이다.
 광기서린 눈빛의 인간 연산군은 정진영이 열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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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의 신하들은 대부분 어머니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던 정적이기도 하다. '신하를 포함한 모든 백성은 왕이 다스린다'는 왕의 입장과 '왕은 어디까지나 첫번째 사대부일 뿐'이라는 신하의 입장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그린 <왕의 남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두번째로 일어난 반정인 '중종반정'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광대들의 한바탕 놀이를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연산군의 동물적인 정치 감각은 우리가 처음 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왕의 남자>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장면들이 여야의 극한 대립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역사를 통해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전매특허인 '온고지신'은 연산군의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확실한 '힘'을 바탕으로 매섭고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물론 때때로 <황산벌>과 마찬가지로 이준익 감독의 입장이 확실하게 보이는 장면이 많아 관객들 사이에서 논란이 전개될 우려도 없잖아 있지만, 정치 현실에 대한 화두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준익 감독 스스로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의사와 지지 정당을 표방하는 할리우드의 영화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언급을 가능한 한 자제해 온 우리 영화계의 풍토가 요즘 들어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그때 그 사람들>이나 <왕의 남자> 등의 영화들은 최근 들어 가장 멀리 나간 정치적인 풍자극이다. 정치적인 입장은 그 사람의 인생 철학과 신념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기회로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영화인의 정치적인 입장은 그 영화인의 세상과 영화를 바라보는 눈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논란이 일어난다면, 그 논란 자체로 건강한 결론을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경우도 많다. 아니, 논쟁이 부족했던 이 사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바로 '논란'이다.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충실하게 전개되는 논란과 논쟁이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건강하게 이루어지는지 엿볼 수 있는 척도가 되는 순간도 많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더 많은 '논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웃음 속에 감춰진 광대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삶의 애환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배우들이 보여주는 몸을 아끼지 않은 열연은 <왕의 남자>의 진정성을 살찌우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풋풋함을 앞세우며, <패왕별희>의 장궈룽(장국영)처럼 짙은 화장 속에 많은 의미가 담긴 미소와 한줄기 눈물을 흘리던 '공길' 역의 신인 이준기는 물론이고, 삶의 허무란 허무는 모두 느끼고 있는 '인간 연산군'을 연기한 정진영, 그리고 본분을 지키는 광대 '장생' 역의 감우성, '육갑' 역의 류해진 등은 필사적인 연기로 이 애틋한 이야기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저마다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들,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아픔을 가진 그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결국 그들은 과거를 살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느꼈는가?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다. 영화는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충실한 삶 속에서 흘려야 했던 우리의 눈물이 가슴 속에 숨어 있다가 새삼스럽게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웃음, 그 유쾌한 단어 속에는 우리의 삶의 애환이 숨어 있다. 웃기 위해, 그리고 웃기기 위해 우리는 참 많은 눈물을 흘려 왔다. <왕의 남자>는 혹시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더라도 웃음 속에 감춰진 애틋한 눈물과 사연을 애절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자체에서 감동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굳은 감동이 아닌 살아있는 감동처럼 좋은 감동은 없다. <왕의 남자>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동을 보장한다.
 광대가 타는 외줄은 우리 인생을 은유하는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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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장르는 바로 '온고지신' 장르화가 어디 별 건가? 감독이 추구하는 개성을 확실하게 확립시켜 다수든, 소수든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를 얻어 꾸준히 전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장르화'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며, 감독 스스로의 주관을 설득력있게 전개시킬 수 있는 영화, 그런 영화가 바로 이준익 감독의 '장르'라고 볼 수 있겠다. <황산벌>에 이은 <왕의 남자>, 이만 하면 대성공이다. 충분히 '장르'로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풍요 속의 빈곤'에 시달리는 한국 영화는 <왕의 남자>를 통해 2005년의 마지막을 앞두고 눈여겨봐야 할 요소를 발견했다. 이 눈여겨 볼 요소를 꾸준히 발전시킬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이들이 다름 아닌 관객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관객은 이렇듯 자신의 영화적인 개성과 철학을 꾸준히 전개하는 감독들에게 앞으로도 애정어린 시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준익 감독은 물론이고, 2006년을 맞이해 앞으로도 더 많은 감독들이 조금 더 치열하게 자신의 영화 철학을 드러내는데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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