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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 기억 들쑤시는 새 화자(話者)

전주국제영화제 관람기 - 고호빈 감독 <맹(盲)>

03.04.30 22:59최종업데이트03.05.0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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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
전주 국제영화제 닷새째 날, 비평가주간 ‘한국단편의 선택’에 출품된 단편영화 감독과 평론가 9인이 모여앉아 한국 독립영화의 문제와 전망을 논의한 포럼 ‘독립영화, 그 이상과 현존’이 열렸다. 다음 상영시간에 맞추느라 빠듯했던 시간과, 그리고 아무래도 사전준비 부족으로 볼 수밖에 없는 패널들 간의 동문서답 때문에 긴장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주목해볼 만한 논쟁거리 몇 개가 등장했었다. 그 중 하나가 과연 ‘고답적인’ 형식을 통해 새로운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독립영화’란 독립해서 떨어져 나와야 하는 대상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생래적으로 ‘전선(戰線) 위의 개념’이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다. 따라서 어쩌면 그 생래적인 새로움과 다름에 대한 집착이 낳는 어느 만큼의 공백과 아쉬움은 곱게 보아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번 비평가주간 ‘기억의 분열, 악몽의 재현’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움에 대한 집착과 과대포장의 유혹을 충분히 털어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젊은 영화들 속에서 눈에 띄는 한 편이 있었다. 고호빈 감독의 <맹(盲)>. 이번에 등장했던 단편영화들 중 가장 ‘고답적’인 영화라고 감독이 자부하는 영화였다.

80년 5월, 계엄군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리에는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고, 시민들의 피로 얼룩졌던 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신축된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남은 그 시절의 흔적들도 밀려나고 있는 굴착공사 현장에서 두 구의 주검이 발견되고, 그 길을 지나가던 맹인 안마사는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80년 5월 어느 날, 자신의 아파트로 숨어든 피투성이의 사내는 물 한 모금을 채 얻어 마시기도 전에 들이닥쳐 문을 두드리는 계엄군 때문에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이러다간 둘 다 죽소. 꼼짝 말고 계시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제 발로 창밖으로 나서 집중사격을 받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그의 혼령은 굴착공사장에 누워있던 시신 자리에서 살아나 안마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앞이 안 보이는 것이 비겁하기까지 해서, 그 때는 그렇게 나가는 것을 말리지도 못혔소.”
“아직도 그걸 기억하시오? 남들은 다들 잊었는데…. 잊으시오.”

고호빈 감독은, 광주를 기억하자고 말하는 것만도 (영화 속에서는 ‘그만 잊으라’고 말했지만)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미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하게도 고답적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자란 생각이거나, 아니면 겸손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광주’에 관한한 모두가 맹인이다. 비겁했으며, 천만 다행이게도 현장에 있지 않았거나 혹은 그 시대를 같이 하지 않았던 덕에 삶을 뒤척이며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어설픈 기억과 망각의 공백 속에서 이십년을 흘려보낸 핑계를 얹어 그 학살의 자리에 들어선 할인매장과 아파트에서 편히 산다만, 과연 정말 그 날을 잊을 만큼 우리 양심은 단단하가? 영화는 그렇게 묻는다.

아마도 80년 광주는 어떤 식으로든 기억될 것이다. 다만 ‘야인시대’ 속 무장독립투쟁이나 4.3항쟁처럼 왜곡될 수도, 모욕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시키는 영화의 미덕은 그 사건자체가 아닌 혼백을 똑바로 기억시키려는 투쟁의 흔적 속에서 찾아지게 될 것이다.

그날 자신을 스쳐서 사지로 몸을 던진 사내를 기억하는 맹인 안마사는, 오월항쟁의 영웅 윤상원 열사(<부활의 노래>)나 죽은 엄마의 손을 뿌리친 죄책감을 못 이기고 미쳐버린 소녀(<꽃잎>)보다 훨씬 집요한 방식으로 곁에 붙어 앉아 ‘광주’라는 신경을 건드린다.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2003-05-01 11:5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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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