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시면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서 노래하겠다고 빌었는데 지금은 나만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어요. 그래서 벌받은 거예요.” 마추피추의 정상에서 유진은 신령한 기운에 쌓여 자신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해달라고 빌었다.
 |  | | ▲ 유진은 원하지 않는 동행을 만난다. | | ⓒ 씨엔필름 | 신기하게 그녀의 기도는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가 된다. 그렇게 명성을 얻을 무렵 뮤지컬 배우로서, 한 생명으로서 치명적인 설치암 즉 혀 밑에 악성 종양이 생겨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그녀에게 노래를 못하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는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난다.
공중화장실 구석자리. 자그만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혜나. 변기의 뚜껑을 닫으며 물을 내리는 순간, 그녀는 눈물을 쏟아낸다.
태어남과 동시에 화장실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 자신의 아이. 그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커멓게 젖은 눈빛은 짙은 화장 속에 감추려 했던 그녀 마음속의 빈자리를 보여준다.
 |  | | ▲ 혜나는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 | ⓒ 씨엔필름 | 그녀 역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존재. 자신의 기구한 인생이 다시 반복되는 현장에서 그녀의 시선은 아주 조그만 생명에 가있었다.
정작 같은 공간에서 잠시 숨을 쉬었던 아이는 그 개미만도 못한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 개미를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던 혜나. 문득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아가겠다며 무작정 남쪽으로 향한다.
이름을 물었을 때 그녀는 주희 엄마라고 말했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재차 물었을 때, 그녀는 부끄럽게 웃으며 옥남 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덕에 남자동생이 태어났다며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
 |  | | ▲ 상처받은 이들을 꽃섬으로 데려가는 옥남 | | ⓒ 씨엔필름 | 큰 눈망울의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던 옥남. 늙고 돈 많은 남자가 자신의 배 위에서 심장이 멈추는 것을 지켜보게 되면서 남편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남편은 옥남에게 몇 푼의 돈을 쥐어주며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집으로 갈 수 없었던 옥남은 친구가 살고 있는 남해의 꽃섬으로 떠나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그 꽃섬에 가면 슬픔도, 괴로움도 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큐멘터리 기법의 극사실적 영상과 환타지가 혼재되어 보는 도중 혼란스러웠던 영화 <꽃섬>. 송일곤 감독은 이 영화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말했다.
그 동화의 배경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운 겨울이었고 옥남, 혜나, 유진 세 명의 주인공은 그 겨울의 복판을 지나 남해에 있는 꽃섬으로 갔다.
 |  | | ▲ 꽃섬의 포스터 | | ⓒ 씨엔필름 | 영화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인물은 옥남이었다. 그녀는 다른 주인공과 달리 치마를 입고 눈길을 헤맨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백치미가 반짝거렸다. 사람에 대한 악의가 제거된 듯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한없이 받아주기만 할 것 같은 모성이었다.
피어싱과 화장으로 치장한 십대의 미혼모는 가볍게 깔깔대며 옥남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옥남은 진실을 담아 그녀의 질문에 답한다. 그리고 혜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참 예쁘다고 마음을 담아 감탄한다.
그때까지 옥남을 모자란 사람 쳐다보듯 바라보던 혜나의 시선에는 변화가 생긴다. 그 눈빛의 진심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후 옥남과 혜나는 같은 길을 가는 동무가 되었다.
옥남의 그 모성은 여리고 약하지만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사람 앞에서는 강인해지고 의연했다. 희생을 강요당하고 이에 순응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모성을 이상화 시켜놓았다는 비판의 요소가 다분한 인물이었지만 논리적인 비판보다 감성적 공감대가 우선이었다.
옥남에게 의지하여 꽃섬에 간 것은 다른 주인공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성애적 호소력이 없었다면 꽃섬에 당도한 관객들이 절반은 줄었을 것이다.
 |  | | ▲ 혜나는 뷰파인더로 세상을 본다 | | ⓒ 씨엔필름 | 미혼모 혜나는 끊임없이 캠코더의 뷰파인더로 세상을 보려한다. 카메라의 렌즈로 보는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단순하고 담백하다. 또한 카메라에 잡힌 세상은 임의대로 변조도 가능하다. 세상이 그녀를 변조했듯이 그녀도 세상을 자신의 이미지로 바꾸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카메라로 보는 세상보다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육지의 끝에서 본 바다, 태어나 처음 본 그 풍경에 혜나는 소리를 지른다. 그동안 참아왔던 응어리를 풀어 해치며. 그 고성에는 상처의 회복에 따른 희열이 느껴졌다.
 |  | | ▲ 유진은 옥남과 혜나에게 마음을 연다 | | ⓒ 씨엔필름 | 세 명의 여인 중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유진. 그녀가 돌아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옥남과 혜나와 달리 그녀의 슬픔은 타인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그녀의 아픔은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병든 육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그 병의 원인을 자신의 교만함으로 여기며 참회하는 그녀의 모습은 일견 매우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 역시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와 공간적으로 유사하다.
<꽃섬>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이 영화를 다큐로 여기며 보아야할지 환타지로 여기며 보아야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 고민이 바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핵심이 되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다큐 같은 현실 가운데 한 구석에는 자신들이 어렸을적 꿈꾸던 환상의 세계가 숨어있기를 원한다.<꽃섬>은 정확히 그 지점에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 | ▲ 꽃섬으로 가는길은 멀기만 하고 | | ⓒ 씨엔필름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옥남이 떨어진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현금지급기 앞에서 카드로 통장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일행과 떨어져 텅빈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며 머뭇거리는 그 씬이 없었더라면 영화는 현실과 환타지가 유리되어 서로 겉돌며 영화의 응집력이 한결 약해졌을 것이다.
다큐적인 현실과 영화 같은 환타지를 같은 시공간 안에 자리잡게 해준 것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없었다면 <꽃섬>은 한국영화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반지를 팔아 여비를 마련한다.
환상이나 착각에 빠져 있다가 정작 이 현실이 한치의 허튼 곳도 없는 냉엄한 공간임을 절실하게 깨닫는 때가 바로 내게 얼마나 돈이 있는지를 확인할 때 아니던가.
 | | ▲ 운전기사는 이들을 산속에다 버리고. | | ⓒ 씨엔필름 | | 다큐로 시작한 영화는 버스기사의 뜬금 없는 협박으로 갑자기 환타지가 되고 인적 없는 산중에 홀연히 나타난 할아버지를 통해 더욱 어리둥절해 진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가 보여주는 영상은 변함없이 정직하다 못해 극 사실적이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가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찾으려는 옥남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세상은 결코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시공간 속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하여 꽃섬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실재의 공간임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비록 그 섬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낙원이 절대 아닐지라도. 그 섬의 존재를 믿고 가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바로 그러한 메시지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꽃섬>의 주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세명의 주인공이 모두 웃고 있는 장면 | | ⓒ 씨엔필름 | 영화가 끝나고 이어폰을 뺐다. 영화 내내 떠돌던 겨울 바람이 귀에서 웅웅거렸다.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새벽의 창문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조만간 그 창문 옆에 작은 화분을 놓아야겠다며 눈을 감았다. 겨울이 북쪽으로 뒷걸음질하는 계절이었다.
|
2003-02-20 10:14 |
ⓒ 2007 OhmyNews |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