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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10대 영화 중 하나로 회자되는 <성난 황소>(Raging Bull)와 '사상 최대 스크린 확보'라는 기대 속에 개봉한 <챔피온>.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지만, 둘은 분명 닮은 점이 있다.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오프닝으로 꼽히는 <성난 황소>의 쉐도우 복싱. 그래서일까? <챔피온>의 예고편은 흑백의 쉐도우 복싱을 선보였다. 이마 많은 이들이 최고의 권투 영화이자, 탈 권투 영화인 <성난 황소>를 생각하며 <챔피온>을 기대할 것이다.
외형상
외형상으로 두 영화는 많이 닮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니로가 완벽한 조합을 이룬 <성난 황소>,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견인차로 나선 곽경택과 유오성 콤비가 다시 뭉친 영화라는 게 우선 비슷하다.
두 영화는 40∼60년대 미국의 링을 주름잡았던 세계미들급 챔피온 제이크 라마타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유머러스한 기질을 숨기지 않았던 비운의 헝그리복서 김득구를 영화의 소재로 삼는다.
두 사람 모두 영화 소재로 제격인 부박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또한 사실상의 영화 그 자체인 로버트 드니로와 유오성 모두 실제 인물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진정으로 그의 페르소나가 되기 위해 뼈를 깍는 노력 끝에 복서로 다시 태어났다는 점도 그렇다.
오프닝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은은한 간주곡이 흐르는 가운데, 흑백의 사각링에서 느린 그림으로 드니로의 쉐도우복싱이 펼쳐진다. 흑과 백의 농도로만 조절되는 여백의 미, 절제된 질감은 생사의 공간에 유장함을 불어넣는다.
관중으로 가득 찬 링 밖은 역광으로 인해 암흑으로 처리되고, 희뿌연 사각의 링 한 귀퉁이에서 가운을 뒤집어쓴 음영의 그림자가 날리는 짧은 훅, 짧은 스텝, 복서는 비장하게 상대를 기다린다. 그 누구도 '가장 아름다운 오프닝'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장면이다.
<챔피온>의 오프닝은 김득구가 쓰러지기 한 시간 전, 라스베가스의 특설 무대이다. 자꾸 <성난 황소>와 비교해서 그런지 <챔피온>의 라스베가스 특설무대 신은 너무 열려 있다. 긴장감과는 무관하게 카메라의 시선이 자꾸 딴 데로 가고, 시끄럽고 산만하다. 또한 김득구와 맨시니가 첫 주먹을 날리는 동작에서 끝나는 오프닝은 '뭔가를 덜 본 것 같다'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유오성의 쉐도우 복싱은 로버트 드니로 못지 않다. 동양 타이틀을 놓고 김광민과의 한판을 앞둔 시점, 흑백 화면 속에서 경쾌하게 움직이는 유오성의 발놀림은 '대역을 쓰지 않았나?'싶을 정도로 날 듯이 가볍다.
복싱 모션
<챔피온>의 제작진은 모션캡쳐 기술을 통해 복서의 주먹이 관객의 관자노리를 향하도록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고 한다. 김득구와 상봉(정두홍)의 시합 때 아마 액션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마치 권투 선수처럼 실제 스파링을 하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하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의 6라운드 이후 격돌은 두 배우의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유오성의 훅은 대부분 손목이 뒤로 꺽이고 만다. 실제 김득구 선수는 라스베가스 대전에서 뒷걸음질을 치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고 한다.
<성난 황소>의 복싱 장면은 그렇게 사실적이지는 않다. 일방적으로 맞고 있다가, 어느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어 불같은 펀치를 날리고 다운을 빼앗는다. 하지만 매 게임마다 보여주는 그 피 튀기는 장면들은 정말 생동감 넘친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 선명하게 뿜어져 나오는 피는 흑(黑)으로, 수없이 흩날리는 선수들의 땀방울은 엷은 회색으로 표현된다. 생과 사가 오가는 폭력의 전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드라마
제이크 라마타와 김득구의 인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두 영화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록키 시리즈'에 익숙한 할리우드에 당혹스런 권투영화를 선사한 스콜세지와 김득구라는 인물의 일대기에 초점을 맞춤 곽경택 감독의 영화는 출발선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성난 황소>의 피 튀기는 복싱 장면은 제이크 라모타의 삶을 지배하는 전형화된 폭력을 상징된다.
그는 권투 시합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폭력에 물들어 있으며, 그 폭력은 삼류 배우로 타락한 자신에 대한 자학이기도 하다. 스콜세지는 제이크 라모타의 상용화된 폭력을 통해 링 위에서나 가정, 사회에 걸쳐 있는 미국 생활의 폭력를 비판한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서 "한때 눈이 멀었지만 지금은 볼 수 있다"는 성경 구절을 통해 제이크 라마타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도 함께 보낸다.
<챔피온>에 있어 드라마의 진폭은 너무 좁다. 인간 김득구, 복서 김득구의 인생역정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한 느낌이다. 120분 동안 김득구가 싸우는 대상은 오직 자신 혹은 타이틀뿐이다. 링 밖의 야합이나 동료 선수간의 갈등 관계는 너무 얕고, 챔피온을 향한 불타는 집념과 열망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다.
고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라도 겉멋을 들이고 싶지 않았을까? 물론 감독은 가급적이면 내러티브를 통해 비명에 스러진 김득구에 대한 아련한 감동을 이끌어내고 싶어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의도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120분 동안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시퀀스가 수차례 등장하고, 여기저기서 관객들의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리지만, 뭔가 강렬한 한방은 보여주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Raging Bull'은 국내에 '분노의 주먹'으로 소개됐지만, 많은 분들이 '성난 황소'로 말씀하셔서 그렇게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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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6-28 1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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