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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권이 사라진 시대의 불안한 모권

영화 <패닉 룸>

02.06.25 15:45최종업데이트02.06.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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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의 네 번째 작품인 <패닉 룸>은 솔직히 염려스러웠다. 전작들의 비범한 플롯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범했기 때문이다. 한 이혼녀가 딸과 밀폐된 방에 갖히고. 밖에는 강도들이 있다. 말 그대로 패닉 상태다. '뭐 우여곡절 끝에 알아서들 잘 빠져나겠지. 그런데?' 그래서, 호기심이 더 커졌다. 좋아하는 감독을 꼽으라면 항상 3순위 안에 들어가는 핀처였기에 말이다. 그는 이 평범하고 식상한 플롯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을까?

변심한 아버지의 시대

이 영화의 키워드라면 '가족'과 '모성'이고, 이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장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패닉 룸>의 원조라면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의 1955년작 <광란의 시간>(Desperate Hours)이다(이 영화는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1990년에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 작품과 원작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될 것). 탈옥수 3명이 교외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접수한다. 내분을 겪던 가족은 도리어 이 위기를 헤치고 가족애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라면 지혜로운 가장인 아버지이다. 이미 위기의 조짐을 보이던 1955년의 미국 가족에서, 험프리 보거트(Humphrey Bogart)가 연기한 아버지는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잘 드러나듯이, 70년대로 넘어오게 되면 가족의 위기는 가장의 권위로 봉합되기에는 힘든 정도에 다다른다. 물론, 할리우드는 꾸준히 위기에 맞서는 아버지, 가정을 수호하는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재생산했지만, 그것은 현실을 거꾸로 세운 환상에 불과했다.

어머니 쪽은? 부권(父權) 즉 가장의 위치를 대체할 모성이 드물게 표출되긴 했지만, 이는 전형적인 가족의 맥락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모성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된 영화들인 <글로리아> <에이리언2> <테미네이터2>가 그 예로, 이들은 모델로서의 가족에서 부권을 대체할 모권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패닉 룸>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만일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 위기가 닥친다면?' 당연히 남은 자는 어머니뿐이다.

불안한 모권(母權)

<패닉 룸>의 어머니 맥 알트만(조디 포스터)은 불안하다. 남편이 젊은 모델과 바람난 덕에 딸 새라 알트만과 단둘이 남겨진 어머니는 당뇨병을 앓는 딸 걱정에, 그리고 혼자 남겨졌다는 고립감에 흐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당혹감과 슬픔을 추스릴 틈도 없이 집안에 침입한 삼인의 강도는 맥과 사라를 패닉으로 몰아넣는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버지, 즉 예전에 가족의 수호자였던 부권이 철저하게 회의된다는 점이다. 천신만고 끝에 전화로 연결된 아버지 스티븐은 도움이 되긴커녕 도리어 포로의 신세가 된다.

핀처는 아버지 스티븐을 어머니 맥에 비해 상당히 노쇠한 인물로 설정했다. 문득 그의 여성 편력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유능한 약리학 교수 스티븐 알트만은 능력만 있다면 가족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변화된 부르주아 남성상을 대변한다(한마디로 <섬원 라이크 유>에서 애슐리 주드가 설파하는 '암소/수소' 이론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래서였을까? 스티븐은 자신이 부른 경찰이 찾아오자, 단절된 공간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은 딸은 안중에도 없는 듯, 이렇게 말한다. '경찰에게 알려 버리라구!' 딸의 목숨을 팔아 범인을 처리하려는 철없는 아버지의 모습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광란의 시간>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증발해버린 부권(父權)을 대신할 것은 모권(母權)뿐이지만, 아직은 불안하고 위태하다. 딸 앞에서 강해 보이려 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세상의 진리도 가르쳐 보지만, 아직 가족의 중심으로 선 것도 설 준비가 된 것도 아니다. 이렇듯 영화 속 맥은 바로 가족해체 시대에 가장의 자리로 떠밀린 어머니의 불안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도덕의 계급 혹은 계급의 도덕

불안한 모권만으로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단서를 쥐고 있는 캐릭터가 도덕적인 흑인 노동자 번햄이다.

범행에 가담해서도 그는 사람을 해치는 데에는 철저히 반대한다. 반면, 거액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룸펜 프로레타리아트 라울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 범행 동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니어나 라울이 돈 자체를 위해 가담했다면, 번햄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범행에 끼게 된다. 번햄은 독백처럼 사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참 부자인 모양인가봐. 집이 좋구나. 우리 아이들도 이런 집에서 살았다면. … 나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더불어, 번햄이 영화 속의 유일한 흑인이라는 점, 엘리트인 맥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굴리는 유일한 캐릭터라는 점도 매우 이채롭다. 도덕과 지능을 갖춘 흑인 노동자 계급. 불안한 모권의 맥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는 역설적으로 이 계급의 적에게서 나온다.

사회계급이라는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적대관계(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이지만, '도덕'이 절실히 필요했던 구체적인 맥락에서 그들은 서로 연대하게 된다. 번햄은 계급을 초월할 '도덕의 계급'인가 아니면 '계급의 도덕'을 표현했을 뿐인가? 아니면 흑인 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허구적이고 비겁한 할리우드식 온정주의일 뿐인가? 영화에서 번햄의 자리는 그만큼 논쟁적이다.

입(入)과 출(出), 그리고 공간의 정치학

이 모든 은유의 사회적 관계를 둘러싸는 것은 바로 패닉 룸과 이 방이 속한 집이다. 불안한 모권, 계급과 도덕이라는 역설과 질문이 서로 뒤엉키는 '지도'로서의 집이다.

애초에 패닉 룸은 칩입에 대비한 부르주아의 피난처였다. 하지만, 적의 치밀한 공격으로 인해 패닉 룸은 도리어 고립과 (말 그대로) 패닉의 공간으로 돌변한다. 강도들은 집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외부로 나가는 모든 통신수단을 끊는다.

룸펜과 프롤레타리아의 범죄 연합이 부르주아를 쥐덫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이들 역시 부의 과실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궁극의 승리를 위해서는, 패닉 룸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게 위기 공간(집과 외부의 단절)의 생성과 공간 내의 공간(패닉 룸)을 둘러싼 절박한 투쟁이 중심을 이룬다.

재미있는 것은 후반부에서 이 공간의 대립이 반대로 뒤집어진다는 것이다. 맥은 밖으로 나오고 범인들은 부가 숨겨진 패닉 룸에 입성한다. 여전히 아이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어머니는 반대로 패닉 룸 외부에서 범인들의 동선을 제한하고, 이제 부를 차지한 범인들은 자신이 짜놓은 계급투쟁의 공간을 벗어나려 애쓴다.

이렇듯 <패닉 룸>에서 구획된 각각의 공간은 계급성이 발현되고 변형되는 장이다. 범인들이 인위적으로 창출한 계급투쟁의 공간(집)에서 패닉 룸은 공격의 대상이다. 하지만, 세력의 배치가 역전된 이후 패닉 룸은 탈출의 공간으로 바뀐다.

거시적인 계급투쟁에서 국가 권력과 부르주아의 은행은 '탈취'의 대상일 뿐 '탈출'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집'은 애초부터 부르주아의 '섬'이었을 뿐 사회 자체는 아니었다. 공간을 둘러싼 입(入)과 출(出)의 미시 정치학이 정지하면서 붕괴가 발생하는 순간은 바로 이때이다.

불안은 지속된다

마침내 붕괴된 입(入)과 출(出), 남은 것은 무엇일까? 번햄은 부를 탈취하여 무사히 섬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그는 도덕을 위해 과감히 희생의 길을 택한다.

흑인 노동자계급인 번햄이 가장 도덕적인 결단을 내린다(그것이 도덕의 계급이든 계급의 도덕이든). 불안한 모권은 번햄의 도움으로 어렵게 위기를 벗어나 목표를 이룬다. 가장이라는 강력한 남성이 흔적없이 사라진 가족은 지독한 모성과 계급을 넘어선 초월적인 도덕에 의해 겨우 유지된다.

하지만, 이 불안하고 예외적인 평화가 지속될 수 있을까? 새 집을 구하기 위해 센트럴 파크 벤치에 누워 신문을 보는 모녀를 둘러싼 공기는 어딘가 무겁고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2002-06-25 15:5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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