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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자!!!

<마제스틱>은 왜 위험한 영화인가?

02.04.30 21:59최종업데이트02.04.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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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전 아카데미상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여하기 위해 엘리아 카잔 감독이 노구를 이끌고 시상식장에 들어왔을 때 식장은 둘로 갈라졌었다. 기립박수를 치며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고개를 처들고 앉아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를 그저 쳐다보는 사람들. 스티븐 스필버그 등은 전자에, 에드 해리스 · 닉 놀테 등은 후자에 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맥카시즘 시기 동료들을 '빨갱이'로 밀고한 카잔의 정치적 오류와 더불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앙금으로 남아 있는 할리우드의 뿌리깊은 상처가 드러났던 것이다.

<쇼생크 탈출 Shawshank Redemption>(1994)과 <그린 마일 Green Mile>(1999)에서 자유주의에 기초한 전형적인 미국식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던 프랭크 다라본트가 1950년대 초반 맥카시즘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영화 <마제스틱 The Majestic>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다운 선택이었다.

아직 상처로 남아있는 사건이긴 하지만 이미 역사적 심판을 통해 마녀사냥으로 규정된 맥카시즘은 어쩌면 다루기 안전한 소재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여자를 꼬시기 위해' 좌익 서클에 가담했던 적이 있는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피터 애플턴(짐 캐리 분)은 차를 몰고 가던 도중 다리에서 추락한 후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가 발견된 곳은 로슨이라는 작은 마을의 해안. 그런데 그 마을에서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2차 대전 때 전사한 마을 청년 루크로 인식하는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전쟁 영웅의 귀환은 마을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활력소가 된다. 얼떨결에 애플턴도 자신을 루크라고 여긴다. 거기에 전에 사귀었던 아름다운 아델까지도 나타나 다시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중 '빨갱이 작가'로서의 그의 존재를 확인한 FBI가 들이닥치고 그는 청문회에 불려가 있지도 않은 동료들의 이름을 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제스틱>은 90분으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150분으로 쓸데없이 질질끌고 있다. 로슨 마을에서 아델과의 로맨스, 그 곳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교류로 채워지는 중반부 이후에는 과연 이 영화가 앞에서 제시한 맥카시즘을 다룰 의지는 있는 건지 의구심이 일게 만든다.

종반부에 가서야 극적인 맥카시 청문회 장면이 기다리고 있지만 관객들은 이미 진이 빠지고 난 이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1950년대 미국 문화사를 읽어낼 수 있는 좋은 텍스트 역할을 한다. 로슨 마을의 유일한 극장 '마제스틱'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51년 당시의 미국 영화들을 회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파리의 아메리카인 An American in Paris>와 함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가 보여진다. 엘리아 카잔의 이 영화가 제시되는 것은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51년 카잔은 이 영화를 만든 후 이듬해에 <혁명아 자파타 Viva Zapata !>를 만들었다. 엄혹한 맥카시즘 시절에 멕시코 좌익 혁명가를 찬양하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동료를 팔아먹었던 카잔이 그런 영화를 만들리 없었다.

그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멕시코 혁명은 지극히 회의적이며 자파타는 곧 패배자로 그려질 뿐이다. 대자본의 지원하에서 그의 자기 변명은 지속된다. '54년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에서 그는 악의에 가득차 미국 노동조합을 타락한 집단으로 형상화한다(물론 미국의 노동조합이 종종 마피아 등 범죄조직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은 노조 흠집내기에 다름 아니다).

같은 해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영화인들(허버트 비버만, 마이클 윌슨, 폴 재리코)이 국제탄광노조의 지원하에서 미국 독립영화의 기념비이자 '투쟁하는 노동계급' 영화의 진정한 걸작 <대지의 소금 Salt of the Earth>를 만들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또 한편의 영화인데 제목을 알 수 없는 B급 SF영화이다. 괴상한 우주복을 입은 외계인들이 지구와 화친을 하고 싶다고 외치면서 갑작스럽게 어설픈 '지구 수비대'를 공격하는 이야기. '50년대 B급 SF영화가 맥카시즘 시기 확산된다고 믿었던 공산주의(실제로 확산된 것은 반공주의였지만)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다는 영화사가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이 B급 영화의 삽입은 맥카시즘에 대한 은유로 여겨진다.

이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영화는 인간애와 소박한 애국심으로 상징되는 로슨 마을의 평화와 광신적인 반공주의로 대표되는 맥카시 청문회의 살기(殺氣)를 극명하게 대립시킨다.

전자가 상처받은 마을을 재통합시켜줄 수 있는 영웅을 원한다면 후자는 권력획득의 과정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전자의 이데올로기(애국주의)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후자의 이데올로기(반공주의)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물론 마을의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 전사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담지하고 있는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지배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며 언제든지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영화에서 애플턴은 청문회에 나가 떨리는 심정을 억누르며 용기있게 외친다. "루크가 몸바쳤던 미국은 크고 장엄했지만 지금 당신들이 대변하는 미국은 작고 졸렬하기 짝이 없소." 솔직히 감동적인 장면이다(그러나 <프론트 The Front>에서 우디 알렌이 청문회 위원들에게 통렬한 Fuck You!를 선사하는 장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냉정함을 잃고 감동의 물결 속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절대 냉정을 잃어선 안된다.

암, 안되고 말고. 아무런 정치성도 없는 장면이라면 감동의 눈물을 흘려도 되겠지만 이런 영화에선 절대 침착해야 한다. 다시 돌아가보자. 애플턴의 말이 맞을까? 그렇지 않다. 루크가 몸바쳤던 미국과 꼴통 맥카시스트들이 대변하는 미국은 똑같은 미국이다. 그것은 똑같은 지배 계급 내에서 좀더 번지르르한 자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느냐 칙칙한 반공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애플턴에게 할리우드 고문 변호사는 말한다. "이런 마녀 사냥 시기에 헌법수정조항(사상, 표현의 자유를 명시해놓은 문항) 운운하는 것은 순진한 짓이야. 어차피 헌법이란 서명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 그건 어차피 협상의 대상이란 말일세." 이 얼마나 자명한 진리인가? 자유민주주의를 이토록 훌륭하게 표현하는 영화가 있었던가?

위의 지당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예찬한다. 꼴통같은 반공주의로부터 세련된 자유주의의 가치를 지켜내자고 말한다. '여자 꼬시려는' 생각에 개념없이 좌익 서클에 들어간 무고한 젊은이를 희생양으로 설정한 이 영화는 마치 진짜 '좌파'나 진짜 '빨갱이'는 다 쓸어버려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제스틱>은 인간의 보편적인 자유를 찬양한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이데올로기이다. 계급과 인종, 성 등을 초월한 보편적인 자유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면, 단 한 곳, 영화 속 변호사가 말한 '서명된 종이쪼가리' 속에 있다.
2002-04-30 22:0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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