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그들이 던진 화염병,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02.03.31 14:19최종업데이트02.03.3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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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은 영화의 흥미성, 유미성 면에 있어서는 확실히 떨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현재의 우리들의 감수성에 강하게 어필하고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눈시울을 적시는 이유는 이 영화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소시민들의 삶의 모습을 진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은 할리우드에 등장하는 것같이 영웅을 출현시키지도 않고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같이 스펙터클한 장면이나 화려한 앵글샷, 관객의 혼을 빼놓을 정도의 긴박한 스토리를 갖고 있지도 않다. 소박하게 사는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그 안에서 감독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하사탕’이 말하는 역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하사탕’의 시작은 현재에서부터 비롯되지만 이는 영화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내용상 영화의 출발점은 1970년대 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대는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나 들었을 법한 과거다. 70년대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더러 기껏 경험해봤댔자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을 눈물바다로 적셨던 최루탄 냄새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이렇게 유신정권과 그것을 이은 또 다른 군부세력. 이는 우리 역사를 얼룩지게 만들었던 오점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내몰아 피를 흘리게 했던 원흉이었다. 결국 박하사탕에서 얘기하려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은 지각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지속됐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들은 젊음을 내걸고, 새세상을 피로써 맹세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힘없는 소시민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원망하며, 체제에 순응해 나갔다.

그 중에 또 다른 부류는 데모 때문에 생기는 교통체증을 원망하며 ‘데모하는 새끼들은 모두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화풀이를 했고, 그 중에 또 다른 부류는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세상이 조용할 날이 없다’며 ‘말세가 왔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갈망했고 그 결과로 지금의 민주화가 이룩되었지만, 그 옆에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무언의 다수’가 비중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무언의 다수’ 안에는 수수방관하며 현실에 순응하다가 민주화가 되면 똑같이 그 혜택을 받는 자들을 모두 포괄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김영호와 같이 군사정권체제를 비호하며, 민주화세력을 박해했던 세력까지도 포함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김영호와 같은 경우다. 그는 군대시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사의 명령에 의해 작전지역으로 투입되어 데모행렬를 진압한다. 그리고 경찰시절 역시 자신의 의지와 달리 학생을 고문하며, 그것을 직업적으로 하게 된다. 그의 본성은 선하고, 깨끗하였지만, 그가 살아온 사회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김영호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간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하지만 ‘박하사탕’은 시대를 적극적으로 헤쳐가지 못한 김영호에 긍정적이지 않다. 사회가 병들어 있다가 체념하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이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지 않은가.

그는 고문에 무감각하고, 외도에 능숙한 ‘불구적 프랑케슈타인’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상에서는 김영호 같은 인물이 결과적으로 파산해서 자살하는 것으로 극화시켰지만, 아직도 김영호 같은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모습들은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찌되었건 그 시절엔 개인의 목소리는 낼 수 없었고 사회에 편입돼 있는 개인은 사회 앞에 무기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김영호와 같이 체제에 순응하며 자신의 안녕과 이익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박하사탕’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영호는 바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김영호는 경찰시절 자신이 고문했던 학생을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고, 아이를 가진 가장이 되어 있었다. 김영호는 당시 학생이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오늘날 우리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문민정부를 탄생시켰고, 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도 이루었다.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민주주의는 서서히 정착돼 가고 있다. 이제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당시의 민주화 투사들은 현업으로 돌아가 생업에 봉사하고 있다. 우리가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세상은 조용해졌으며 그때의 함성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메아리친다. 정말 살만한 세상이 온 것이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했다.

그러나 ‘박하사탕’은 이러한 현실을 긍정할 수 없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민주화를 위해 자신들의 젊음을 희생한 자들과 다른 한편으로 수수방관하며 추이를 지켜보다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무언의 다수가 이 땅 위에 공존하며 살고 있는 현실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부끄러웠던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이는 민주화의 봄을 꽃피우기 위해 선봉장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열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요, 그들이 일궈놓은 업적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대접과 사회의 홀대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결말부분에 주인공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맺음시켜 일말의 보상을 꿈꾸고 있다. 즉 과거에 호가호위 하며 살아왔던 자의 무참한 최후를 보여줌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단지 영화상에서나 존재하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감추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자신을 민주화 투사로 위장하기도 하고,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며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들, 무언의 다수는 이제 ‘세상은 아름답다’며 땀 한 번 흘리지 않은, 피 한 번 흘리지 않은 값싼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 그들의 권력을 이용해 축적한 자본으로 자본주의의 사회를 즐기고 민주화에 환호하고 있다. 결국 본말이 전도된 우스운 세상, 도둑이 오히려 주인 나무라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무얼 쓸지 몰라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영화와 내가 서로 공감하는 영역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러다 문득 국민학교 4학년 때 국민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노선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분이었고, 아마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표준적인 인간상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싫어했고, 데모 때문에 교통이 막힌다고 짜증냈으며,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피를 토했다. 그 말은 우리 부모님도 하셨고, 옆집 아저씨도 그러셨고, 지나가다 발에 채이는 아줌마도 그러셨다. 사람은 모름지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다가는 가랭이가 찢어진다고……. 결국 나는 박하사탕의 주인공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방법만 달랐다 뿐이지 우리 역시 주인공과 하등 다를 것 없는 인간이었다.

아직도 개중에는 가랭이가 찢어지는 줄 알면서도 무언가를 위해 실천하는 지성들이 사회 곳곳에 있다. 그리고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고, 옆에서 방관하는 자들이 있고, 그런 자들을 전문적으로 잡아들이는 ‘프로’들이 공존하고 있다. 더 이상 기대도 희망도 바랄 것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만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그들이 일궈 놓은 민주화의 봄, 그리고 그렇게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해 밝혀진 민주주의의 횃불을 소중히 지켜나가야겠다는 것이다.
2002-03-31 14:0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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