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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이상관 | 국제배드민턴연맹(IBF)이 공인하는 세계적인 초특급 국제월드그랑프리 대회인 2002코리아오픈배드민턴선수권대회(이하 코리아오픈)가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전남 여수 흥국체육관에서 열린다.
지난 91년 한국배드민턴 중흥의 기치를 걸고 처음 국제 규모의 오픈대회로 열린 코리아오픈은 올해로 11개의 성상을 놓으며 세계 최고의 대회로 자리매김했다.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대회가 여러 개 있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메이저급 대회는 6 star급 대회인 코리아오픈이 유일하다. 코리아오픈은 한국스포츠의 자랑이다.
상금 규모나 권위, 출전선수들의 면면에서 코리아오픈은 세계 최고(最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영오픈과 함께 세계 배드민턴을 이끌어가는 메이저대회임에 틀림없다. 98년에는 IMF 금융위기로 대회가 취소되기도 했지만 최고 권위의 국제대회로써 손색이 없는 코리아오픈은 한국배드민턴인들에게는 자부심, 그 자체다.
1991년 1월 22일,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코리아오픈이 열리기 전까지 한국배드민턴의 현주소는 외국에서는 인기 최고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81년 황선애의 출현 이후 10년 연속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배드민턴은 국내에서는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곱씹으면서도 외국에서 156회의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배드민턴을 세계에 알린 선두주자는 황선애 씨. 황 씨는 81년 덴마크오픈 우승으로 홀연히 출현한 뒤 스웨덴오픈, 전영오픈, 일본오픈 등 단번에 4관왕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후 한국 배드민턴은 김연자 씨와 유상희 씨를 배출하며 맥을 이었고 박주봉 씨, 김문수 씨, 정명희 씨로 이어지는 '마의 삼각지대'를 형성, 도전자들을 거센 파도 속으로 차례로 침몰시켰다. 일본오픈 혼복 4연패, 남자복식 3연패, 최고 권위의 전영오픈 혼복 4연패 등 빛나는 업적은 모두 라켓으로 일궈낸 값진 수확이다.
황 씨가 한국배드민턴의 선구자라면 박주봉 씨는 전성시대를 활짝 연 셔틀콕의 황제라고 볼 수 있다. 82년 고교 2학년 때 대표팀에 발탁된 그는 대표생활 9년 동안 무려 52회의 국제대회 우승기록을 갖고 있는 불세출의 스타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김문수, 정명희와 무적의 트로이카 시대를 열어 세계 남자복식과 혼합복식을 모조리 석권했다. 이 셔틀콕의 황제는 김문수와 짝을 이뤄 통산 23번의 우승 경력을 갖고 있으며 '텔레파시 콤비' 정명희와는 19번의 우승을 일궈냈다. 이들은 91년 현재 각각 8년(남복), 5년(혼복) 동안이나 '찰떡궁합'을 유지, 상대를 바꿔가며 도전해 온 뭇 도전자들을 물리쳤다.
박씨를 비롯 김,조씨는 지난 8년 동안 단 4패만을 기록중이며 박,정, 조 씨는 5년간 지난 88년 월드컵대회 때 중국 조에 딱 한번 졌을 뿐 무적을 자랑하고 있다. 주요선수 우승기록을 보면 박주봉 52회, 정명희 40회, 김문수 24회, 김연자 14회 등이며 10년간 국제대회 우승 횟수는 81년 4회, 82년 2회, 83년 17회, 84년 7회, 85년 12회, 86년 17회, 87년 21회, 88년 25회, 89년 26회, 90년 23회 등이며 91년은 1월 20일에 끝난 재팬오픈에서 남복과 혼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을 비롯한 한국선수들이 지난 10년간 벌어들인 상금도 어느덧 57만여 달러(4억여만 원)에 달한다.
이처럼 한국배드민턴이 10년만에 혁명에 가까운 회오리를 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얼까? 전문가들은 선수가 우수하다고해서 1년 평균 16회 우승의 대기록을 세울 수는 없으며 선수와 감독, 그리고 효율적인 대표팀 관리가 삼위일체가 되어 만든 합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한국배드민턴은 황선애 신화에 연연하지 않고 지난 82년 박주봉·이은구 조가 첫 출전한 덴마크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체력 소모가 큰 단식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과감히 복식으로 살길을 찾았었다.
등록선수라야 2500여 명에 달하는 현실에서 경기인구만 30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을 비롯, 스웨덴 등 전통적 강국들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모든 대회가 단복식 5개 부문으로 열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에이스급 선수들이 단복식을 모두 뛴다는 것은 어차피 무리였으며 이러한 장기적인 전략은 중국과 단복식 분할시대를 여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은 한국배드민턴은 이를 계승할 차세대의 대책 마련에 부심중이다. 기존스타들은 이제 석양에 서 있으나 유망주들은 아직 새벽을 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코리아오픈의 탄생
코리아오픈을 얘기하자면 먼저 탄생 비화부터 들춰야 한다. 그리고 비화의 주인공은 한국배드민턴의 대부 김학석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이다. 김 부회장 특유의 저돌성과 뚝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코리아오픈은 없었을 것이다. 배드민턴에 미쳐 한평생을 한국배드민턴 발전에 헌신한 김부회장은 박주봉·김문수(남자복식), 박주봉·정명희(혼합복식)라는 환상의 콤비를 앞세워 세계정복에 나섰고 85년 캘거리세
계선수권대회에서 남복·혼복을 제패하며 세계무대에 마침내 한국배드민턴을 알렸다. 캘거리대회 제패후 국제배드민턴연맹(IBF)는 코리아오픈 창설을 요구했다.
국제대회에 출전도 힘들었던 시절, 국제대회 창설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핑계로 미뤘으나, 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대회에서 박주봉·정명희 조가 혼복에서 2연패하자 국제연맹의 압력은 거세졌다. 그러나 당시 협회는 회장사 부도로 협회살림조차 꾸려가기 힘들 정도여서 대회창설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런 김 부회장이 90년 IBF총회에서 대회창설 요구에 덜컥 'OK' 해버렸다. 협회는 김 부회장이 또 사고를 쳤다며 걱정했으나 의외로 김 부회장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짐직 여유였다. 김 부회장의 믿는 구석은 일본의 세계적인 스포츠메이커인 요넥스. 당시 요넥스는 일본스포츠용품업계 매출 4위, 순이익 2위의 세계굴지 회사로 한국대표팀과 용품계약을 하고 있었다. 김 부회장은 용품재계약을 조건으로 요넥스에 코리아오픈 스폰서를 제의하고 비용으로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창설대회인데다 극동의 외진 한국에서, 그것도 겨울에 열려 전혀 흥행을 기대할 수 없는 대회. 최고 권위의 전영오픈도 50만달러 미만에 계약한 요넥스는 김 부회장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불도저·무대포로 통하는 김 부회장이 물러설 리 없었다.
요넥스의 거절에 오기가 발동한 김 부회장은 용품재계약을 하지않겠다는 1차 협박에 이어 요넥스의 경쟁사인 영국의 칼톤사의 친구에게 부탁해 칼톤사 용지를 이용, `91년부터 한국선수단이 칼톤사와 용품계약을 할 계획'이라는 거짓문서를 팩스로 발송케하고 이를 요넥스 사내에 있는 정보원에게 흘리는 2차 압박작전으로 요넥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월드스타 박주봉이 칼톤사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는 것만으로 치명적이라고 판단한 요넥스는 40만 달러를 제의했고 김 부회장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며 3년계약을 체결했다. 모두들 힘들다는 코리아오픈은 이렇게 첫해 총상금 10만 달러의 대회로 탄생했고 7천만 원이라는 흑자를 내며 흥행에도 대성공했다.
코리아오픈의 성장
코리아오픈은 7회 대회인 97년부터 상금을 25만 달러로 파격적으로 인상, 세계최고대회로 성장하는 계기를 맞는다. 이것도 김 부회장 뚝심의 결과. 98년 대회는 IMF로 무산됐지만 국제연맹은 98년부터 6개 국제오픈대회를 선정, 그랜드 슬램대회를 창설하려 했다. 매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국제대회는 30개의 오픈대회 포함, 300여 개. 그중 6개 대회만을 선정한다는 것은 `그랜드슬램'이라는 타이틀 외에 우수 선수 참가로 대회 수준은 물론 올림픽출전에 필요한 그랑프리포인트도 높았다. 선정만 되면 스폰서를 유리한 조건에서 선정할 수 있어 코리아오픈은 반드시 그랜드슬램 6개 대회에 끼어야 했다.
그러나 코리아오픈은 역사도 짧고 여건상 불리한 점이 많았다. 방법은 파격적인 상금 인상 뿐. 마침 삼성전기가 협회를 맡을 계획이어서 김 부회장은 삼성전기측과 협의, 회장 지원금에 코리아오픈 상금인상을 포함시켜 25만 달러짜리 대회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전영오픈이 2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로 상금을 올릴 조짐이었는데 멋지게 치고 나갔고 국제연맹 뿐만아니라 세계 배드민턴계가 놀랐다. 코리아오픈은 이렇게 메이저대회로 다져졌다.
코리아오픈과 한국배드민턴
한국배드민턴은 9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박주봉·김문수, 황혜영·정소영 조의 남녀복식 금메달과 방수현의 단식 은메달,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방수현의 여자단식우승과 혼복결승에서 김동문·길영아 조와 박주봉·라경민 조가 맞대결, 금·은메달을 차지하는 등 한국배드민턴은 세계배드민턴계의 강호로 급부상했다. 그 배경이 코리아오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리아오픈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들이 한국을 찾았고 그들과 경쟁하면서 한국배드민턴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1월 개최라는 계절적 요인과 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했다는 지역적 불리함에 원년대회 때는 협회 직원들이 선수초청에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출전선수들을 오히려 선별해야 할 정도다. 코리아오픈에서의 우승은 어떤 국제적인 스타들이라도 자랑이고 자신의 경력에 중요한 한부분이 됐다. 한국에선 박주봉·김문수·정명희·황혜영·길영아·방수현, 라경민 등이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하며 월드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중국의 우 웬카이, 황 화, 탕지우홍, 예 차오잉, 게 페이, 구 준, 인도네시아의 조코 수푸리안토, 아디 위라나타, 수지 수산티, 덴마크의 연인 피터 게이드와 카밀라 마틴 등 숱한 월드스타들이 코리아오픈을 통해 배출됐다.
배드민턴 동호인은 동록 회원만 160만이 넘어섰으나 아직도 코리아오픈이 열리는 경기장은 드문드문 빈 자리가 많이 보인다. 세계최고 수준의 대회답게 배드민턴팬들로 가득찬 경기장에서 신바람나게 경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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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2-20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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