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성조기여 영원하라?

영화 <콜래트럴 데미지>를 통해본 미국

02.02.19 09:51최종업데이트02.02.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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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와 흡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개봉이 연기됐던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액션 영화(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는 국책영화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콜래트럴 데미지>는 전쟁이나 테러 등 군사작전으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이 입은 희생을 의미하는 말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아주 익숙하게 우리의 눈길을 파고 든다.

소방관 고디 브루어(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어느 날 아내와 아이를 만나기로 한 곳에서 폭발물이 터져, 처자식이 눈앞에서 끔찍하게 희생당하는 엄청난 비극에 말려든다. 콜롬비아 극좌 반군의 우두머리인 클로디오의 테러로 밝혀졌지만,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고디는 클로디오에게 복수하기 위해 혈혈단신 콜롬비아의 밀림에 뛰어든다.

이후 영화는 개인과 국가정책간의 갈등, 테러범의 비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며 약간의 반전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곤 액션영화의 공식을 철저히 따라간다. 이쯤 되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클로디오를 물리친 고디는 국민적 영웅이 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액션의 배경이 달라질 뿐 언제나처럼 미국은 위대하며 승리는 자신들의 것임을 한 개인의 비극이라는 통속적인 은유를 통해 보여주는 <콜래트럴 데미지>는 바로 그런 점에서 완성도 여부를 떠나 가장 미국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새옹지마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묘한 상황을 맞이한 <콜래트럴 데미지>는 공교롭게도 현재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있다. 9·11 테러가 가져다준 영화의 비극적 운명이 반 테러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미국의 초국적 테러로 인해 빛을 발휘함으로써 내용보다 더 드라마틱한 영화가 된 것이다.

할리우드영화의 이념적 중독성을 잘 나타낸 다음의 장면은 과연 이 영화가 테러에 맞서는 한 가장의 가족애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패권주의국가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고디가 마시는 컵은 성조기가 그려져 있고, 클로디오가 분개할 때 레닌과 체 게바라의 사진은 마치 테러를 지시한 듯한 눈빛을 하고 벽면에 걸려 있다. 언제나 그랬지만, 놀라운 미장센이다.

<록키>나 <인디펜던스데이>처럼 '직접적이고 단순하게'가 아니라 보다 은유적이고 보다 교활하게 자신들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의 제국은 언제나 승리하고 절대 선이며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요하는 참으로 대단한 집착과 집중력을 보여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떠오른 단상이 있다. 오비이락이라고 해야 할까? 부시 대통령의 방한에서 콜롬비아 정글로 떠나는 고디 브루어(아놀드 슈워제네거)의 환영이 보이는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일까? 아니면 다시 미국으로 테러범 클로디오를 쫓아가는 그들만의 <코만도>를 떠올려야 할까?

영화의 마지막처럼 부시의 방한은 갑자기 <다이하드>를 찍게 된 <코만도>가 <천장지구>를 흉내낸 테러범 남녀를 몰살시키고는 건물 안이 답답했던지 머나먼 한국 땅에 와서 한판 더 이벤트를 벌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행기를 강매하든 스크린쿼터를 박살내든 뭔가 자신의 초월적 존재를 확인하고픈 육식공룡의 모습과 미국은 너무나 흡사해 보인다.

<콜래트럴 데미지>를 보며 얻은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부시의 방한을 반대하는 한총련 대학생들의 미 상공회의소 점거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반미 분위기는 평화를 전제로 하지 않은 반 테러는 또 다른 테러일 뿐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과연 누가 희생자인가?
2002-02-19 09:4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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