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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겐 야멸치게 들릴 이야기지만 해야겠다.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청년이라면 누구나 톨스토이를 읽는다. 그러나, 톨스토이를 읽는 사람 모두가 톨스토이처럼 쓸 수는 없다는 것을 두 번 말할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가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아비뇽의 여인들>을 적당히 짜깁기해 그린 그림을 <게르니카의 여인들>이라고 이름 붙이고, 자신도 '입체파 화가'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사람들은 그를 무어라 부를까? 혼성모방의 귀재? 패러디의 천재? 무어라 불리건 그는 '창조'적인 예술가는 아닐 터.
디지털 캠코더의 보급과 상용화로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열정'과 '도전정신'만으로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서 보여준 전위성 혹은, <저수지의 개들>에서 발휘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튀는 감각에 이를 수는 없는 일이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강론이 감독하고, 펑크락 그룹 '크라잉 넛'의 멤버들이 출연한 디지털 영화 <이소룡을 찾아랏>은 젊음과 언더그라운드(혹은, 마이너리티)의 특성이라 할 '실험정신'과 '정열'이 곳곳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러나, 영화엔 실험정신과 정열만으론 가 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 뭘까?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의 답습
<이소룡을 찾아랏>은 '스토리'를 따라가며 보는 영화가 아니다. 서사구조는 완벽히 붕괴되어 있고, 카메라의 시점도 시시각각 옮겨다닌다.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라는 고전적 서사양식에 기대어 영화를 해석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스토리 대신 감독이 영화의 전면으로 내세운 건 '이미지'다.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각각의 이미지가 연출을 통해 재구성되어 영화의 기둥을 세우는 방식. <이소룡을 찾아랏>에는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오염된 강의 부유물(浮遊物)처럼 떠돈다.
 |  | | ▲<이소룡을 찾아랏>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 '노출증 환자'와 '쇼비니스트' '다리 잘린 소녀'와 '연쇄살인범', 거기에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까지.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통합된 하나의 조형물로 집약되지 못하고, 제각각 의미 없이 떠돌 뿐이다. '난삽함'이 영화적 전략이라는 변명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렇다면 그건 지나치게 관객을 배려하지 않은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사용된 이미지는 난삽할 뿐 아니라, 어디선가 본 듯한 것들이다. '예상치 못한 연쇄살인범'이란 설정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에서, '흑백의 정지화면으로 보여주는 사진의 나열'은 이전의 단편 실험영화들에서, '순교의 의미를 벗어난 십자가의 등장'은 비판적 종교영화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해온 것들이 아닌가. '노출증 환자'야 더 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영화의 골격을 이루는 이미지가 이렇듯 난삽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거기에다 답습의 양태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영화의 이해는 어렵고, 74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마저도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마추어 배우의 기용이 참신하긴 하지만...
<네버 마인드 블록(Never Mind The Bollocks. 77년)>이라 이름 붙인 단 한 장 앨범만으로 펑크락의 역사에 빛나는 이름으로 남은 영국의 그룹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크라잉 넛'은 '노 브레인'과 더불어 자타가 공인하는 '섹스 피스톨즈'의 적자다. 그들의 노래 '말달리자'는 한국 펑크락의 주제가로 지칭될 정도.
한두 마디로 정의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단순함'과 '직격성'이 펑크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유효하게 작용한 '단순·직격성'이 영화에까지 힘을 뻗치지는 못하고 있다.
 |  | | ▲배우로 출연한 '크라잉 넛'의 멤버들. ⓒ인디스토리 |
아마추어 배우의 기용이 낯선 것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아니, 여타의 극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직업배우가 아닌 아마추어 배우를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도 이영애와 유지태에게 밥상을 차려주던 시골 할머니가 등장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핵심은 아마추어 배우를 쓰느냐, 직업배우를 출연시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된 배우가 영화 속에서 얼마만큼 유효적절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녹여내는지, 연출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혹은, 이미지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의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이소룡을 찾아랏>에서 '크라잉 넛'은 둘 중 어떤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질 못하고 있다.
시사회 관객들이 그들의 굳어 있는 몸 동작과 국어책을 읽는 듯한 대사에만 실소를 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물론 관객까지 영화의 맥락을 읽어낼 수 없도록 만드는 과도한 단순성과 '현실'과 '영화적 현실'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엇나간 직격성에 더 큰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등장인물의 성격 설정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니 감독의 연출력은 개입할 여지조차 없다. 이는 영화가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의도한 것이다'라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영화가 자기가 만들어 자기만 보고, 자기만 이해하는 자위의 도구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 그것들이 빠져 있구나
 |  | | ▲영화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 '크라잉 넛'의 꾸밈없는 모습과 강론 감독의 실험정신과 열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존재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고단한 작업을 폄하할 생각에서 시작된 글은 아니므로. 그러나, 앞서 자문(自問)한 것에 대해 자답(自答)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의문이 기자만의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영화에서 빠져 있는 그 '무언가'는 뭘까?
'이미지 조합능력'과 '주제로 집중하는 연출력'이다.
그리고, 하나 더. 영화 <이소룡을 찾아랏>에는 '이소룡'이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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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1-30 1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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