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평소 보고 싶었던 독립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작품의 명성을 익히 알고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극영화처럼 극장에서 장기간 상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비디오처럼 가게에 가서 빌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이다. 그 작품은 바로 장희선 감독의 '고추 말리기'다.
우리의 공영방송 KBS에서는 몇 개월 전부터 '단편영화전'이라는 주간 프로그램을 편성해서 방영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독립영화판에서 제작되고 있는 단편영화를 엄선해서 방송하고 있다. 물론 방송되는 작품에는 KBS와 방영권에 대한 계약을 맺고 일정액의 방영료도 지불되고 있다.
EBS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단편 영화극장'이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형식의 방송을 하고 있지만 공중파 3사로는 KBS가 처음으로 모험적인 프로그램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시청률과 광고에 목을 매는 공중파로서는 쉬운 편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KBS의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로들로부터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금요일 밤 12시 50분이라는 좋지 않은 편성시간에도 불구하고 광고도 많이 붙고 있다. 한마디로 시청자와 독립영화계 그리고 광고주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영화제나 무료 상영회가 아니면 관객과 만나기 힘든 독립영화의 현실에서 방송이 하나의 훌륭한 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간혹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일요스페셜을 통해 방영된 적이 있지만 고정적인 출구는 아니었다. 아무쪼록 이 프로그램 '단편 영화전'에서도 극영화만 고집하지 말고 많은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방영되어 독립영화 중 다큐멘터리의 안정적인 출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이 있다면 방송심의에 의해서 독립영화의 실험성이 작품의 부분 삭제에 의해 거세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부디 편성 시간과 편성의도를 고려해서 기존의 다른 방송물과는 다른 심의 잣대가 운영되기를 바란다.
장희선 감독의 ‘고추말리기’는 이미 국내에서 국외에서 여러 영화제를 통해 상영되었다. 그리고 상도 많이 받았다.
<작품개요>
제목 : 고추말리기 (시간 54분/16미리)
감독 : 장희선, 촬영 : 고형욱, 제작 : 1999년 영화제작소 청년
<수상내역>
▶제2회 서울여성영화제 단편경선 부문 우수상, 관객상 ▶제25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새로운 시선 부문 우수상 (1999)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초청 (1999)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타리 영화제 '99 뉴커런츠 초청 ▶제50회 베를린영화제 인터내셔널 포럼 초청 (2000) 등등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신인감독에게 쏟아진 국내외 영화계의 주목으로는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 영화는 왜 우리의 시선을 그리고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일까? 아마 각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주시한 것은 형식적 실험성과 그 실험성이 담보해주고 있는 리얼리티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도 있고 실화와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는 논픽션 극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감독이 실제 출연자 즉 주인공들을 인터뷰한 디지털캠코더 화면이 교차로 편집되어 있어 극영화와 인터뷰 중심의 다큐멘터리의 이중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감독이 실제 주인공들과 인터뷰 하는 내용은 극영화 부문의 배경이 되어 극영화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한 집안의 시어머니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나(여자) 감독의 관계를 담고 있다.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은 시어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 어머니보다 할머니와 더 친한 주인공 나와 어머니와의 관계. 딱히 극영화적 흥미요소를 가지고 있는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관객을 붙들어 두는 흡입력이 있다.
어머니는 살찐 딸이 먹을 것만 찾는 것을 보면 언제나 살 빼라고 구박을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는 전통적인 고부관계처럼 소원하다. 감독의 제작후기에 의하면 감독 장희선 씨는 가정적인 이유로 어머니와 살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작품 속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들어와 합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선가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다정 다감하거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딸', '난 시집 안가고 엄마랑 살래' 그런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갈등이 자주 등장하는 관계다.
영화는 시종 일관 세 사람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딸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침대에서만 뒹굴고 어머니는 직업을 가지고 계시는지 외부의 사람들을 만나는 씬들 (예를 들면 친구)이 자주 등장한다. 대신에 할머니는 하루종일 집안일을 한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는 일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감독은 직접 어머니와 할머니를 인터뷰한다. 물론 이 화면은 극영화의 연장 선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터뷰 형식으로 별도 촬영된 화면이다.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시어머니인 할머니에 대한 생각과 살아온 이야기를 딸에게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마 이 영화작업이 아니었으면 딸에게 할 수 없을 이야기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인이 되고 싶었다던 할머니의 이야기도 소개된다. 할머니의 시는 소박하고 투박했다.
이 영화에는 세 가지의 매력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이 영화의 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식이다. 특별한 사건과 사건의 해결을 기본으로 하는 오락적 대중영화보다는 '인간시대'류의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의 힘은 이 다큐멘터리적 요소에서 나오고 있다.
세 여자의 이야기는 이땅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감 없고, 숨김 없는 이야기이다. 할머니들이 보더라도 딸들이 보더라도 어머니들이 보더라도 저건 내 얘기야 할 수 있을 정도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다음으로 이 영화의 힘은 제작기법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형식의 실험성에서 나온다.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들은 감독 장희선 씨 가족의 실제 이야기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극영화에서 출연하고 있는 배우들 또한 실제 장희선 씨의 어머니와 할머니다. 그러나 그들은 연기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듯하다. 그만큼 그들의 연기는 자연스럽다.
다만 주인공 장희선 씨의 역할만 배우가 맡아서 연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감독의 의도인지 유독 주인공 '나'만 단독으로 나오는 씬들은 오히려 작위적이고 연출된 느낌을 많이 주고 있다. 왜 감독은 실제 어머니와 할머니를 배우로 출연을 시켰을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배우도 실제 인물을 묘사할 뿐 실제 인물이 될 수는 없다는 리얼리티의 원칙 혹은 다큐멘터리의 원칙을 생각해 본다면 장희선 감독의 선택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녀가 더 없이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리얼리티였을 것이다.
세 번째 이 영화의 힘은 감독의 연출력이다. 감독은 자기 집안의 이야기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고 따로 배우를 구하지 않고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출연제의를 했을 것이다. 당연히 어머니나 할머니가 처음에 허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의 연기가 그렇게 자연스러웠을까? 아마도 이는 장희선 감독의 힘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거나 발단과 해소라는 스토리 중심에서 벗어나 그냥 담담하게 일상의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인물 묘사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관객인 나는 그 인물 묘사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픽션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것이 개연성에 기초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장 감독에게는 다른 숙제가 있었을 것이다.
장 감독은 개연성에 기초한 보편적인 할머니, 보편적인 어머니, 보편적인 딸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 인물 나의 할머니,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를 묘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배우가 아닌 실제인물을 캐스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이 극영화 속의 인물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짐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을 묘사하는 연출력이 신인답지 않게 뛰어났다. 연기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출연자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제작을 해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하다. 지시하고 시킨다고 해서 그런 연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출연자들과의 관계, 현장의 분위기 조절 등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이는 정말 힘든 것이다.
물론 나이든 어른들이지만 내 어머니 내 할머니였을테니 감독이 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겠지만 그런 요소가 오히려 연기를 시키는 데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장감독은 배우들의 연기를 너무나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세가지 이 영화의 힘은 곧 실험성이라고도 생각된다. 감독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면서 두려움과 불확신에 많은 고민을 했을테지만 너무나 매끄럽게 너무나 훌륭하게 그 일들을 해내고야 말았다. 난해함이 곧 실험성이라는 다소 정형화된 공식을 가지고 있는 영화 판에서 나는 이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고 너무나 기뻤다. 이 영화의 실험성은 내가 보아온 실험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
사람에 따라 견해는 다르겠지만 나는 실험성이라는 것을 이렇게 이해한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 즉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연출력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 그런데 그 새로움이란 것이 관객에게 난해함을 던져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글쓰기에서 그렇고 영화에서도 그렇고 난해한 창작품들이 실험성이라는 가면을 두른 채 발표되곤 한다.
그러나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글, 보아서 이해되지 않는 영화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물론 창작자의 마스터베이션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나의 마스터베이션을 누군가 봐주기를 기대하면서 내놓은 것이 실험적인 작품이 아니라면 작금의 실험성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고추말리기'를 보면서 내가 앞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가져야 할 실험정신과 그 실험성의 실체가 어떤 것이어야 할지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이 고민은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www.degadocu.com)에서 제공합니다.
|
| 2001-10-09 12:31 |
ⓒ 2007 OhmyNews |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