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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계산 없이 온전히 사랑만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의문을 자신있게 긍정하기에는, 지난날의 기억이 우리의 가슴을 조여온다. 처음 한 번 호되게 넘어지고 나면 여간해서 다시는 자전거를 배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옛 상처에 괴로워하고 행여나 다시 상처가 생길까봐 서투른 조바심을 낸다.
상처는 상처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깨진 유리 조각을 가슴팍에 꽉 껴안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핏물은 흐르고.... 해답은 간단한데, 유리를 놓아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 속은 아직도 그 어디에도 내다 버리지 못한 날카로운 유리조각들로 가득하다.
1. 상우 & 할머니
종종걸음을 내딛으시며 저만치 앞서 가시는 할머니에게 상우는 자전거의 페달을 급히 밞으며 외친다.
"할머니, 같이 가요."
할아버지는 생전에 할머니 이외의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 이 점에서 할머니는 이미 "변해버린" 사랑을 경험한 인물이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낭만적인 명제는 그녀에게 있어선 완벽한 거짓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다른 것은 모두 잊어도 정작 할아버지를 사랑했었던 아름다운 기억은 지우지 못한다.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변해버린 사랑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상우의 모습이기도 하다. 할머니와 상우는 아마 같은 별을 안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닮은 이 둘의 설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카메라는 유독 할머니와 상우의 연대감을 강조한다.
은수가 떠나간 후 어느 기차역, 할아버지를 찾는 할머니에게 상우는 할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은 제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가슴 저릴 정도로 서글피 우는 상우에게 할머니는 말한다. 떠난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것이 아니라고. 변해버린 사랑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사실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치 거울 속의 자신에게 하듯, 할머니는 울먹이는 손주의 입에 사탕 하나를 넣어주며 달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간직해온 묵은 상처를 토해냈던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할머니는, 젊었을 때 사랑한 그 모습 그대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여행을 떠난다.
이미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 둘의 연대는 이로써 파기된다.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제 이 곳엔 없다. 따라서 은수를 마냥 그리워하기만 하는 상우의 모습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겪고 다시 찾아온 은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우. 그러나 그건 상우가 은수를 더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떠난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것이 아니라는 할머니의 말처럼, 이제 상우가 놓치지 말고 꽉 붙잡아야 할 것은 은수 그 자체가 아닌, 은수를 너무나도 사랑했다는 그 기억뿐인 것이다. 그 기억 안에서만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상우의 생각마냥-'이 될 테니까.
2. 은수
어렸을 때, 어른이라는 건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약한 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창으로 찔러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한 갑옷. 그 갑옷을 입고 있는 까닭에 봄날 보드라운 미풍도 모르고, 제 자신의 체온과 맥박도 채 느끼지 못하는 어른.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한 사람과 헤어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은수는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한 번의 이혼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른 은수는 갑옷을 단단히 입는다. 사랑을 조심스러워하고, 상우가 처음 관계를 시도하려고 했을 때에도 더 친해지면 하자는 애매한 말로 그를 거절한다.
하지만 어느 샌가 상우는 은수의 사랑이 되어 있었고 지나간 사랑의 흉터는 아문 듯이 보인다.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은 잠시 레테의 강을 넘는다. 그러나 상우의 프로포즈는 은수로 하여금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김치를 못 담근다'는, 역시 애매한 말로 은수는 다시 한번 견고한 갑옷을 꼭 껴입는다.
다음 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은수. 그녀는 상우의 품에 안겨 이윽고 울음을 터뜨린다. 사실 은수는 내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헤어지기 정말 싫을 정도로 너무나 사랑하지만, 지난 기억이 재현될까 두려워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알고 운다. 아직도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운다. 아니, 입고 있던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우는 건지도...
이튿날 해장국을 끓여 놓은 상우에게 은수는 먹기 싫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속으로는 수도 없이 '미안해'를 외치고 있음이 분명한 그녀. 상처의 기억은 이렇듯 사람을 나약하고 피폐하게 만든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지만, 은수는 끝이 보(인다고 믿는)이는 이 게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건 은수가 더는 상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해 놓고 행여 그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그러다가 그토록 기다리던 상우의 전화에 퉁명스러운 말들을 내뱉은 것은 상우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 크기만큼 두려웠던 은수의 역설적인 반응인 것이다.
사랑의 변질이라는 상처를 입고 다만 겁이 많아진 이혼녀였을 뿐인 은수를 상우가 좀더 이해해주고 배려해줄 수는 없었던 걸까. 그랬다면 어쩌면 사랑은 반드시 변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랑은 구두와도 같은 것이어서, 상대의 구두를 신고 이 세계를 걸어볼 수 있어야 할텐데.
은수를 보면서,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등장하는 시마모토와 어쩌면 그리도 닮을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기억으로 인한 두려움은 사랑마저 잠식시켜 버렸다. 커다란 비밀과 상처를 안고 사는 시마모토. 그녀는 하지메에게 끊임없이 재촉한다.
"(사랑한다면)당신은 나를 전부 취해야만 해요.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부. 내가 질질 끌고 있는 것이나, 내가 껴안고 있는 것도 전부. …… 당신은 그 걸 알아요? 그 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도 알고 있는 거예요?"
은수는 물론 이러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지난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의 영혼을 치유해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다.
3. 소품 & 남은 이야기...
이 영화는 짜증나리만치 일상적이다. 라면의 빈번한 등장, 종이컵에 따라서 마시는 소주, 세차도 하지 않아 때가 가득 진 상우의 자동차, 같은 장소와 늘 만나는 사람들, 온갖 국물이 튀어 더럽혀진 은수네 주방, 소박한 옷차림새... 영화는 이런 소품들의 사용으로 사랑은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에 녹아드는 그 무엇이라는 걸 말해준다.
상우가 은수의 차를 긁는 장면. 운전도 하지 못했던 은수가 자동차를 마련했다는 것은 언제나 그녀를 차로 바래다주던 상우와의 기억에 결별을 고하는 일이다. 이렇듯 자꾸만 멀어져 가는 은수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이상우식 시위인 셈이다. 그리고 이건 프로포즈를 받은 다음 날 은수가 술에 취해 들어와 엉엉 울던 장면과 더불어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기도 하다.
가장 애틋하고 좋았던 장면은, 술에 잔뜩 취해 서울에서 강릉까지 달려 온 상우와 그를 기다리던 은수가 서로 포옹하는 장면이다. 엄청 길다란 상우의 품에 까치발을 해가며 그를 안고 또한 커다란 상우에게 자그마한 은수가 쏘옥 포개지는 모습은, 보고 있는 나마저도 어찌 할 줄 모르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서 은수의 한 마디. "술에 취하니까 더 멋있다." 그 수줍은 감정과 설렘. 어쩌면 사랑은 정말 해볼 만한 건지도 모르겠다.
음악. 이 영화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풍경화식 구도와 세세한 소리까지 잡아내는 소리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준다. 겨울산사의 눈 내리는 소리,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 하얀 여름의 파란 파도 소리... 그리고 은수의 콧노래 소리. 은수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다름 아닌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Plasir D'amour)"이 아닌가.
"사랑의 기쁨은 어느새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
언젠가 신문에서 본 이 영화 광고 속 카피.
'옛사랑의 기억이 살아날 테니... 연인과는 보지 마세요'
생각날 옛사랑이 없다는 게 참으로 아쉬웠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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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0-08 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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