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일을 확인하다보면 시사회 공지가 참 많이 온다.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제대로 신청해 볼 수 있었던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세기말이 되면서 천사와 악마의 출현이 얼마나 많았던가. 영화 제목에서부터 인물 설정에까지 그래서인지 '천국'이란 단어는 호기심을 끌만 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마침 쉬는 날이었다. 아쉬운 것은 너무 늦은 오후 8시 40분 상영.
하지만 나 외에 다른 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 신청을 했더니 당첨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갈 사람을 찾았지만 결국 시네하우스로 가는 길엔 나 혼자. 비가 올 것만 같은 구름낀 하늘이 더더욱 가는 길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간 만큼 영화는 내게 어린 시절을 잠시 돌려주었다.
시사회 시작 전 주최 측에서 이란영화란 말에 머리를 스쳐가는 영화 한 편이 번뜩였다.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어른의 세계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는 일은 어린이의 세계에선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자신의 공책을 가져가버린 친구의 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고 하던 그 모습. 짙은 회색빛 얼굴에 유난히 까만 눈동자에서 흐른 눈물은 우리의 가슴을 얼마나 흔들리게 했는지.
그것과 비슷한 정서의 이 영화는 이란 제 3세대 감독으로 주목받는 마지드 마지디에 의해 감독된 영화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어린 시절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낯익은 비좁은 구두수선 가게에서 때절은 연분홍 구두깁기를 하는 구두수선공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한 손아귀에 들어올 정도의 신발이 다 고쳐진 후 알리(미르 파로크 하스미얀)는 곧장 식료품 가게로 향한다. 굵은 감자를 보고 있는 알리에게 작은
감자가 더 싸다고 말하자 그 쪽에서 감자를 고르는 사이 바깥에 두고 간 신발이 지나던 고물장수 할아버지에 의해 무심코 실려간다.
감자를 다 고르고 계산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외상이라고 말하자, 신경질적으로 조금이라도 갚으라는 말을 남기는 주인. 얼른 돌아가야한다는 마음에 놔두었던 물건을 찾으려하지만 남은건 먹을 것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인 자라(바하레 시디키)에게 그만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눈망울이 까만데다가 그 슬픔은 얼굴 전체로 퍼져 금방이라도 큰 소리로 울 것만 같다. 어린 시절 변변히 책상도 없는 방에서 부모는 부모의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걸 기억할 테다. 알리와 자라의 대화는 당연 자라의 신발에 대한 이야기. 자라는 일러버리겠다고 하고 알리는 참아달라고 하고 결국 알리는 쓰지않은 연필 한 자루를 자라에게 주고 신발을 나눠신기로 한다.
다행히 자라는 오전반, 알리는 오후반이어서 신발을 나눠신게 되는데 맨날 알리는 지각하게 된다. 너무 더러워 창피하다던 자라의 이야기를 듣고 깨끗히 빨아너는데 그 날따라 비가 쏟아진다. 결국 마를까 안마를까를 고민하며 잠을 못드는 두 천사.
아침이 되어 신고 가던 차에 고랑에 한 쪽이 빠진다. 알리가 자라보다 발이 크기때문에 당연 헐렁할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라는 자기 신발과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오빠와 가보는데 아버지가 앞을 못보는 아이였다. 결국 둘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집이구나'라는 생각을 한 듯 다시 돌아오게 되고 다시 자라와 알리의 학교가기는 시작된다.
하나의 신발로 학교를 가는 것. 사실 부모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줄지도 모르는데 어려운 살림을 아는 알리와 자라의 마음이 어린이 답지 않은 듯하면서도 어린이답다. 그러던 차 학교에선 어린이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1.2등은 별 관심거리가 못되는 알리에게 3등의 상품이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1주 캠프와 운동화가 상품으로 주어지기때문이다. 이미 선발이 끝나버린 후에 선생님에게 말하지만 받아주지 않자 까맣고 큰 그 눈망울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어찌나 잘 우는 지 결국 테스트를 받는데 너무도 잘 달리자 흐뭇해 하는 선생님.
결국 마라톤 대회는 시작되고 모두들 새 운동화에 비디오 카메라까지 동원된 날. 부모들의 보살핌이 없는 알리는 초라한 마라톤을 시작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목표의식이 뚜렷한 알리. 달리는 순간순간 자라의 말들을 떠올리며 3등을 위해 달리고 달린다.
하지만 감독은 알리를 3등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힘빠지는 영화일것인가.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감독은 1등을 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모두들 기뻐하며 축하해주지만 정작 주인공 알리는 눈물을 흘리고 독사진 속에서 울고만 있다.
집으로 힘없이 돌아오는 장면 사이에 어렵사리 마련하는 아버지의 두 아이에 대한 신발이 신문지에 싸여 자전거 뒷자리에 빼꼼 보인다. 그걸 통해관객은 흐뭇한 미소를 띄우지만 정작 알리는 자기 집에 있는 우물에 부르트고 까진 발을 담근다. 아무도 알리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자라 마저도 토라져 방안으로 들어가버리고 텅빈 마당엔 알리와 알리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듯한 물고기들만알리의 발등을 맴돈다.
영화를 보면서 여기저기서 "안돼"하는 소리와 "어머나", "세상에"하는 감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한 번쯤은 겪고 보아왔던 이야기여서 일게다. 나도 어린 시절뒤 축이 다 떨어진 아이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나야 신발만은 이쁜 걸 신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때는 새마을 운동을 부르짖던 70년대였으므로 많이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보리밥 검사가 있는가하면 급식빵 먹는 것도 어쩌다 반에서 몇 명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때 머리에 하얀 서캐가 수두룩한 아이들 그래서 빡빡 밀고 오라는 선생님의 호된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깐. 그 뿐인가 운동화가 한 켤레였으므로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전 날 빨아 널은 아이들은 꽉 짜서 부뚜막에서 밥 할때 올렸다가 가져오고 했었다. 남자아이들이야 연탄색이 되도록 신어도 그런가보다 했지만 어디 여자 아이들에게 그리 관대했는가.
신발을 잃고 신발을 다시 찾았을 땐 이미 내 것이 아니고 다시 새로운 신발을 갖기위한 노력은 마치 우리가 잃어가는 유년 시절에 대한 시간을 다시 찾아나서라는 신호가 아닌가 싶다.
사이버공간의 확대와 자아의 상실감과 정체성 혼미 등으로 우린 얼마나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가. 문명의 이기로 점점 나약해 가는 건 사람들의 마음이다. 진정되돌아볼 것은 지나온 보일듯 말 듯한 세상의 거기. 그 곳을 찾아가는 길에 이 영화는 한 몫을 하고 있다.
나는 가난하지 않았으므로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조금만 더 낮게 앉아보면 많은 것들이 우리를 울려줄 것이라 생각된다. 테헤란의 가난한 동네의 우울한 눈동자의 아이를 찾아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마음을 나눠준 영화에 감사한다.
덧붙이는 글 | 어린 시절 신발이 닳아질까봐 맨발로 흙길을 달려본 님들, 새로산 운동화를 누군가 몰래 신고 가버려서 낡아 헤어진 다른 아이의 신발을 신고 와 본 님들. 행여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며 눈을 피해 용케도 견디던 시간들을 지금도 기억하시는 님
들을 위해 ~
|
| 2001-02-25 11:35 |
ⓒ 2007 OhmyNews |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