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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기(性器)가 '음란'의 대상물은 아니다.
영화에서, 더 오래 전 문학에서 상징과 은유로서의 성기와 섹스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928년 발표된 데이비드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에서 보여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행위 묘사는 '귀족사회의 허위의식'과 '붕괴하는 농경 계급사회'를 은유하는 코드로 사용됐다. 이 소설은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영화화됐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72년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등장하는 '폴'(마론 브랜도)과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의 음울한 판화같은 성교는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상실된 현대사회'를 조소하는 수단이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 상대방을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는 장면은 섹스를 통한 의사소통만으로는 결코 확인될 수 없는 현대인의 정체성, 그 혼란스러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99년 개봉되어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은 바 있는 토드 헤인즈 의 <벨벳 골드마인>. 상영 내내 심심찮게 보여지는 '안개처리'된 커트 와일드(이완 맥그리거)의 성기는 60년대 '반전(反戰)운동' '히피즘' '포크 락'과는 다른 형태를 띠기 시작한 70년대 저항의 '양식화'로 읽힌다.
지난 10월 27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 소설엔 해괴한 체위의 성교와 새도·매저키즘에 경도된 폭력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러나 일견 난잡해 보이는 일탈의 섹스를 통해 작가는 '신(神)버지'(부권)로 표현되는 구(舊)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섹스가 신(新)질서 쟁탈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레통의 "아버지의 무릎을 꺾고 목을 자르자"는 선언과도 맥이 통한다.
서설이 길었다. 본론으로 가자. 지난 28일 "비 포르노 영화 중 가장 극적인 영화", "가장 강력한 올해의 영화 후보작"이라는 외국 언론사의 호평을 등에 업고 카뜨린느 브레일라 감독의 <로망스>가 개봉됐다.
17살에 등단한 조숙한 문인이고, 페데리코 펠리니와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경력이 있으며,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여성의 성을 정면에서 다루어왔다는 브레일라 감독의 화려한 이력은 <로망스>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자는 '불편'하고 '불쾌'했다. 근사한 포장지의 빵을 기대를 가지고 뜯었는데, 빵에 곰팡이가 슬어 먹을 수 없었다면 그런 느낌이었을까?
초등학교 교사 마리는 동거남 폴을 사랑한다. 폴 역시 마리를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섹스는 거부한다. 그 '거부'에 모욕감을 느끼는 마리. "내 몸은 나의 것. 나는 자유다"라 선언하며 섹스 상대를 찾는 마리. 밤의 카페에서 만난 성적 매력 넘치는 파올로와 몸을 섞고, 길거리 건달에게 매춘까지 한다. 하지만 그 허망하고 슬픈 성교들은 마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교장 로베르는 마리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피가학성 선호'를 발견하게 해준다. 몸에 감긴 로프가 살을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 성적으로 반응하는 마리. 마리는 폴과의 굴욕적인 섹스로 인해 생긴 아이의 아버지로 로베르를 선택한다. 가스폭발 사고를 위장해 폴을 살해한 마리는 로베르와 산부인과로 간다. 폴의 죽음과 동시에 태어나는 아기. 폴의 장례식장은 쓸쓸하다. 마리의 얼굴은 더 쓸쓸해 보인다.
한국 에로영화의 효시 격인 <애마부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일련의 <애마부인> 시리즈들이 가진 가장 큰 맹점은 '자유로운 성을 통해 해방에 이르는 여성'이라는 선전문구만 요란할 뿐이지 영화 내내 '진정으로 해방된 여성'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망스>도 그렇다. 애초 브레일라 감독이 의도했다는 '섹스를 통한 여성의 자아발견'은 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마리가 로베르에게 학대당하며 '매저키스트'로서의 성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은 자아발견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건 설득력이 약하다. 인간이 어디 '새디스트' 혹은 '매저키스트'만으로 양분될 수 있는 단순한 존재인가?
무너져 버린 감독의 의도는 연출의 힘을 떨어뜨리고, 주제를 향한 집중력도 약화시킨다. 당연지사 <로망스>에서 시시때때로 보여지는 성기와 남발하는 섹스는 '은유'와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날 것'으로 전락한다. '하드코어 포르노'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율리시즈의 시선>과 <토탈 이클립스>를 촬영한 요르고 아르바니티의 점잖은 카메라 놀림이 여타의 '포르노'와는 다른 앵글로 화면을 잡아내고 있고, 선명한 색채의 대비로 인물의 내면과 정황을 설명하려는 감독의 노력 등이 없진 않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논란 유도를 위해 기용했음이 분명한 이탈리아 포르노 배우 로코 시프레디(파올로 역)의 30Cm에 이르는 거근(巨根) 앞에 너무나 무력하다.
삽입 의도가 불분명한 마리의 출산 장면은 아무리 '생명탄생의 성스러운 순간'이라 생각하고 보더라도 보통의 관객들에겐 가혹한 화면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나치게 마리에게 편중된 감독의 애정은 폴을 비롯한 파올로와 로베르 등의 남자배우를 밋밋한 평면의 개성 없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성기가 노출되는 장면을 '안개처리'한 극장 상영판이 아닌 원판 <로망스>를 시사회에서 본 기자에게 친구가 묻는다.
"어땠냐?"
잠깐의 망설임.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급 인력이 만든 재미 없는 포르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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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10-31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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