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는 조르그의 소설을 위해서 존재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1930년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감상적 결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
기쁨과 아름다움은 잠깐, 슬픔과 고통은 영원하리라. 훔친 노란 벤츠로 붉은 해가 떨어지는 황야로 간 베티(베아트리스 달)는 조르그(장 위그 앙글라드)에게 "강간해 줘"라고 말한다. 무릎 꿇은 사랑의 쾌감, 쾌락의 낭떠러지, 몸 세포 모두가 아우성치는 절정을 향하여, 베티는 그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참 뒤에 조르그는 그녀를 죽이고 흰 고양이와 함께 소설을 쓴다. 감독 장 자크 베넥스는 그 소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결코 말하지 않는다.
멜로 드라마에 로드 무비 요소가 들어있는, 멜로 드라마치고는 아주 잔인한, 우스꽝스럽거나 치부를 너무 드러낸 나머지 순결해져 버린 <베티 블루 37' 2>를 쫓아가는 발걸음은 아주 느긋해야 한다. 185분의 디렉터스 컷을 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베티가 되거나 조르그가 돼야 한다. 그런 수고를 아낀다면, 종잡을 수 없는 비선형적인 플롯의 쾌감과 흠칫 흠칫 놀래키는 색채의 느낌이나 풍경의 아우라를 놓칠 것이다. 스무살의 베티는 1년 동안 술집 주인에게 밤마다 시달린 상태였다. 그만큼 정신 또한 황폐해진 상태였다. 서른 살의 전직 소설가 조르그는 베티와 방갈로에서 1주일 동안 격렬한 섹스를 나눈다. 그리고 방갈로 주인 차에 페인트를 끼얹고 방갈로에 불을 지르고는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도 두 사람은 소설 출판을 기대하며, 방향 없는 삶을 격렬함으로 때운다. 회오리 데낄라를 마시거나 베티의 출구없는 광기를 견디면서. 그 후 두 사람은 에디의 고향 피아노 가게를 운영하면서 끝장을 본다. 기대했던 임신이 실패하자, 베티의 광기는 화산처럼 폭발하여 자기 눈을 찌르는 지경으로까지 간 것이다. 노란 벤츠도, 황홀한 저녁 풍경도, 안락하고도 윤택할 수 있는 삶도 베티의 불안 앞에는 아무런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영화의 세 단락 가운데 전반부는 촘촘한 사건과 오프닝의 줌인 섹스 신으로 꽉 차 있지만, 중반부는 느슨한 일상으로 흐느적거린다. 그들의 삶은 여름처럼 무덥거나 겨울같이 황량했다. 하지만 정보를 성실하게 짜 맞추고 마음을 싣지 않으면 지루할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베티의 감정을 싸고 도는 이미지 또한 부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자크 베넥스는 종반부에서 세팅과 색감과 카메라 움직임으로 우리를 다시 스크린으로 끌어 모은다. 베티는 요부와 성녀의 이미지를 오가고, 베티의 주변은 붉은 색 또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조르그는 성실한 세속으로 회항 중이다. 그럴수록 베티는 더욱 불안하다. 그 불안은 여체가 임신하기에 가장 좋은 섭씨 37도 2부를 만들고, 그 고비를 잘못 넘긴 베티는 폭발해 버린다.
조르그 혼자 맞은 새벽, 그 지점까지 우리는 베티의 불안으로 플롯과 이미지를 보았으며, 또 그들의 사랑을 이중적인 심정으로 보았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광기어린 사랑을 대리 충족의 시선으로 보는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세속적으로 안정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프랑스 영화다운 <베티 블루 37' 2>는 이미지와 음악에 기댄 채 쉬운 타협으로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베티는 조르그의 소설을 위해서 존재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1930년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감상적 결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시장과의 타협일까? 기쁨과 아름다움은 잠깐이며 슬픔과 고통은 영원하다고 속삭여 놓고 소설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끝을 맺은 것은, 아마 소설 속에 그것이 들어 있다는 말일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영화 속에서 보고 싶었다. 황당한 질문 하나. 스무 살 베티는 동물이었을까, 인간이었을까? 그렇다면 마흔을 넘어선 나는?
덧붙이는 글 | 제작: 성좌, 카르고 영화사
배급: 20세기 폭스 코리아
감독, 각본: 장 자크 베넥스
출연: 베아트리스 달, 장 위그 앙글라드, 곤수엘로 드 하빌랜드, 제라르 다르몽
장르: 멜로드라마
러닝타임: 185분
개봉: 8월 19일
Film2.0 (www.Film2.co.kr)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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