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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라 하니 당신의 귀를 현혹시킬만한 이야기를 하지요."
영화 '쉘 위 댄스'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40대 중반의 점잖은 샐러리맨 스기야마(야쿠쇼 고지)는 일본 중산층의 전형적인 가장이다. 대기업 총수도 18평 아파트에 산다는 일본에서 좁지만 마당이 딸린 아담한 집도 장만했고 예쁜 부인에 귀여운 딸도 있고, 회사에서도 건실한 상사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회사 술자리에서 9시가 넘자 축 쳐진 어깨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씁쓸하다. 아침이 되어서도 자는 부인이 깰까봐 조심조심 일어나 아침을 챙겨먹고 나가는 그의 모습. 직원들의 투덜거림에도 인자한(약간은 애매한) 미소로 응수하는 모습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그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미모의 여인을 보게되고 그녀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랑'도 아닌 '연정'도 아닌 이끌림. 그녀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어깨에는 점차 힘이 들어간다.
그 미모의 여인은 댄스 교습소 강사 마이(구사카리 다미요). 약간은 내리뜬 뚱한 눈과 새초롬한 입술로 권태롭게 스기야마를 대한다. "개인 레슨으로 끊어드릴까요? 단체 레슨으로 끊어드릴까요?"
사실 이 영화에서 스기야마의 마이에 대한 '감정'은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스기야마의 묘한 들뜸은 마이에 대한 감정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선택으로 무언가 시작할 수 있었다는 생활에 대한 자신감이었기 때문이다.
어줍지 않은 데이트 신청은 칼같은 바람을 맞지만, 진지한 춤에 대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댄스 장비를 마련해 비오는 날 공터에서 미친 사람처럼 원을 그리며 도는 스기야마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피식 터지는 실소와 함께 '나도 저렇게 미칠만한 일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영웅의 탄생이다.
양복에 향수 냄새를 묻혀가며, 부인에게 의뢰받은 흥신소 직원에게 뒤쫓겨가며 스기야마는 '살아있는 나'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자 이제 클라이 막스로 넘어가보자.
조심조심 아무도 모르겠거니 하고 참석한 '아마추어 댄스 경연대회'에 참석한 스기야마. 스기야마의 열정에 '춤의 즐거움'을 되찾은 마이의 집중지도에 부합이라도 하듯 스기야마는 우아한 춤사위를 보이며 댄스홀을 빛낸다.
이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빠! 파이팅' 소리. 설마하던 스기야마의 눈에 비친 아내와 딸. 스탭이 꼬이면서 파트너의 치마를 밟아버리고, '쫘악' 소리와 함께 보기에도 민망하게 찢겨진 치마.
이 소리는 죽어도 회사가기 싫은 아침 침대맡에서 "일어나! 일어나!"를 외치는 자명종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스기야마의 꿈은 깬다. 그는 아내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다시 건실한(?) 가장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다시 축 쳐진 어깨.
어느날 찾아온 댄스 교습소 사람들에게 '마이'의 출국 소식을 듣고 마지막 무도회에 오기를 요청받지만 그는 망설인다. 연미복을 다려놓고 '무도회'에 가기를 종용하는 아내의 응원도 저버린 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는 마지막 순간, 그를 기다리는 '마이'에게 찾아간다. 마지막 '댄스'를 위해.
영화는 이렇게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기야마가 다시 '춤'을 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가 '댄스 교습소'에서 춤에 대한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익명성이었으리라.
가장이라는, 건실한 중역이라는 사회의 눈을 다 털어버리고 단지 '춤'을 추기 위해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그는 마음의 해방을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의 죽어버린 듯한 열정을 되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만난지 얼마 안된 사람들이지만 댄스교습소의 사람들은 십년지기 친구처럼 친근하다. 그들 역시 사회에서는 '윈도우'도 모르는 정보통신과 직원, 징그럽다고 바람맞는 '뚱뚱한 청년'이지만 댄스 교습소에서만큼은 '춤'을 즐기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쉘 위 댄스'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율 브리너와 데보라 카의 '왕과 나'에서 왕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서양의 춤에게 '쉘 위 댄스(?)'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춤을 통해 자신이 이전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를 느끼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자연스럽게 교감하게 된다. '춤'은 그 만큼 동양인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새로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이 끝나면 춤이 끝나듯, 춤은 일상일 수 없다.
그의 딸은 이야기한다. "아빠. 춤추는 모습은 정말 멋졌어요."
그러나 그의 부인과 마당에서 추는 춤은 그리 멋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고정된 곳에서 그 역할을 깨기란 쉽지 않고, 건실한 가장을 원하는 가족들 앞에서 멋진 춤꾼으로서의 스기야마가 되기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한 여름 밤의 꿈이 깨면 다시 작열하는 태양 앞에 땀을 흘리며 서야 하는 것처럼 스기야마의 '쉘 위 댄스'는 막을 내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꼽으라면 잡지에 난 동료를 보고 비웃는 부하직원들에게 얌전한 스기야마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부분을 들겠다.
"왜 알지도 못하면서 댄스를 비웃는 건가?"
이 외침은 부하직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열정을 삭혀버린 사회를 향해 부르짖는 항변으로 들린다.
"왜 나의 열정을 이토록 사그라들게 만들었는가?"
세간의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쉘 위 댄스'가 상영된다고 우리나라 '댄스 교습소' (일명 무도학원)들이 붐빌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건강을 이유로 댄스교습소를 다닐 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고 싱그럽지만 씁씁해지는 영화. '쉘 위 댄스'
이 영화를 보고 집에 가서 아버지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빠? 아빠는 젊었을 때 뭐가 되고 싶으셨어요?"라고 물어봐 드리면 어떨까? 이 영화의 보너스로 아버지의 홍조 띈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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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05-31 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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