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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사이영상 수상이 가능한가? (1)

사이영상, 사이영이 누구인가

00.04.29 16:51최종업데이트00.04.3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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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8일(이하 한국 시간), 아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시즌 2패째를 기록해 시즌 총 3승 2패 방어율 4.60을 기록하게 된 박찬호.

그에 대해 시즌 전부터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선발로 뛰는 투수들의 공통적인 두가지 꿈, 즉 20승 달성과 사이영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 국내외에서는 그 가능성을 논해왔다.

20승이야 쉽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만, 과연 사이영상이란 무엇이며 수상자들은 누구인지, 또 정말 박찬호는 이 사이영상을 수상할 수 있을지, 전체 일정의 12-13%인 팀당 약 20-22 경기 정도를 소화한 현재 어떤 투수들이 사이영상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알아본다.

우선 사이영상이란 무엇인가.

MLB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은 웬만한 야구팬이면 알 것이다. 사이영상은 미국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의 전설적인 투수 '사이 영'을 기리기 위해 1956년부터 미국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미국 야구기자협회 (Baseball Writers Association of America)가 선정한다.

그러면 사이 영이 도대체 누구기에 이 영예로운 상에 그의 이름을 부쳤을까? 그의 기록들을 자세히 되짚어 보자.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마크 맥과이어의 단일 시즌 70홈런, 칼 립켄의 2,632경기 연속 출장, 행크 아론의 통산 755 홈런, 피트 로즈의 통산 최다 안타 4,256개 등 MLB의 불멸의 기록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지만, 사이영의 통산 511승을 기억하는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 511승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 하면, 1930년 이후 최다승 기록은 웨런 스팬의 363승이 고작(?)이다. 511승에 71%로 무려 148승이나 차이가 난다.

1890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1911년 44세로 은퇴할 때까지 사이영의 전설적인 기록들이라고 하면, 그의 최다승(511승), 최다패(314패), 최다출장(815경기), 최다투구인닝(7,357)은 아직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록이며, 승률 61.9%, 통산방어율 2.63을 보유하면서, 단일 시즌 30승 이상 5회, 20승 이상 15회를 기록했다.

그의 사후(1955년), 1956년부터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에 그의 이름을 따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덴톤 트루 영, 그에게 사이 영이라는 애칭이 붙은 것은 마이너리그 시절 188cm, 95kg의 거구에서 내뿜는 강속구로 시합전 워밍업 투구시 향해 던지던 나무담벼락이 완전히 부서지자 누군가 그 담벼락이 마치 싸이클론에 의해 박살난 듯하다고 한 이후였다.

1867년 3월 29일 오하이오주 길모어에서 태어난 사이 영은 1890년 데뷔하여 1900년까지는 내셔널리그에서 활약하였는데, 클리브랜드 스파이더스에서 첫 9시즌을 보내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옮겼다.

당시에는 한 회사가 몇 개의 메이저리그 팀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클리브랜드와 세인트루이스 구단 모두 로빈슨 형제가 소유하고 있어서 시즌 중에 어느 한 팀에 우수 선수를 몰아서 우승을 노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1899년 사이 영이 속한 세인트루이스는 84승 67패를 기록한 반면 클리브랜드는 역사상 최악의 성적인 20승 134패를 기록하였다.

1890년 사이 영은 데뷔전에서 단 3안타만 허용하였고 10월에는 더블헤더 두 경기를 모두 완투하며 팀의 5대1, 7대3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첫 두 시즌을 9승7패, 27승20패로 마감한 사이 영은 1892년 생애 최다승인 36승을 올렸고(11패), 방어율 1.93과 완봉승 9번은 리그 최고였다. 1893년 32승16패를 기록한 후 1894년 25승22패의 다소 불만스러운(?) 성적을 보였으나 1985년 다시 35승10패의 호성적을 기록한다.

이러한 사이 영의 대기록들을 초창기 야구라며 저평가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당시에는 여러 가지로 타자들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야구를 했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우선 1990년까지 스트라이크존의 기준인 홈플레이트의 폭이 12인치(약 30.5cm)로 지금의 17인치(약 43cm)보다 좁았고, 1901년에서야 파울볼도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참고로 1894년 번트 파울, 1895년 파울팁이 각각 스트라이크가 되기 시작했다). 투수로서는 어렵던 이 시기에 사이 영의 방어율은 불과 3.50이었다.

1900년 시즌을 다소 부진하게 19승19패로 마친 사이 영은 1901년 새롭게 발족한 아메리칸리그로 옮겨 보스톤 필그림스에서 활약하게 된다. 1901년 33승10패 방어율 1.63, 1902년 32승 11패 방어율 2.15, 1903년 28승 9패 방어율 2.08로 보스톤에서의 첫 3년 동안 리그 최다승, 최고 방어율을 기록했다.

1903년 보스톤은 아메리칸리그 페난트 레이스에서 우승, 최초의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되고 사이영은 첫 경기 선발로 나섰다. 사이 영은 에디 펠프를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로 삼진 아웃시켰으나 포수가 이 볼을 놓쳐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진루시켜 그 회에만 4실점, 결국 7대3 패전의 멍에를 썼다.

사이 영은 5, 7차전의 승리투수가 되어 보스톤이 최초의 월드시리즈에서 5승 3패로 우승을하는데 기여하였으나 팀 동료 빌 다이닌이 3승을 거둬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이후 사이 영은 1908년까지 보스톤에서 투수 생활을 하며 1904년, 1907년, 1908년 각각 20승 이상을 올렸다.

1909년 클리브랜드로 다시 돌아와 19승15패를 기록하였으며 이어 두 시즌을 7승10패, 7승9패로 마감하였고 1911년 보스톤 브레이브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마친 후 44세의 나이로 사이 영은 은퇴하였다.

사이 영은 19세기와 20세기 모두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이며, 20세기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선수이기도 하다. 1908년에는 41세의 나이에 뉴욕 하이랜더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07년 시즌, 사이 영은 보스톤에서 선수 겸 감독이 되었으나 시즌 초 7경기 후 팀 성적이 3승4패를 기록하자 감독직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반납하기도 하였다.

1936년 명예에 전당에 헌액된 사이 영이 1955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1956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포드 프릭은 사이영상을 제정하여 시즌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키로 하고 대투수의 업적을 기리게 되었다.

원래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한 명에게만 수여하여 오다 1967년부터는 양대리그에서 한 명씩 선정하여 오고 있다.
2000-04-29 16:5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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