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은 멎어버렸는가. 문득 <봄바람 프로젝트> 시리즈가 떠오른 건 최근 보도된 뉴스 한 꼭지 때문이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로 무려 37년에 이르는 복직투쟁을 해온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해고노동자 등으로 이뤄진 30여 명의 참가자와 함께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 달 여의 대장정을 시작한다는 소식이다.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를 향한 걸음엔 '희망뚜벅이'라 이름이 붙었다. 고된 걸음으로 좀처럼 보이지 않는 희망을 구하려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겠다.
해고 노동자들은 지난 2021년 서울 명동 세종호텔에서 경영난을 이유로 정리해고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세종호텔지부 소속 조합원들이다. 해고 이후 5년 여간 복직 투쟁을 벌여왔으나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들이 대한민국 권력 중심부를 향해 진군한다. 코로나19 종식으로 경영난이 해소되고 흑자 전환까지 했는데도 이들의 일자리는 다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교섭은 여전히 멈춰 있다. 그 사이 법원은 해고가 적법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측이 노동자와 함께 위기를 돌파하고 고용을 유지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째서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만이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었을까. 경영난에 대한 책임은 왜 말단 직원들끼리만 나눠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사측도, 사회도 응답하지 않았다. 퇴거에 불응하고 점거 농성을 벌인 이들은 검찰에 송치돼 수사를 받는다. 돌파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듯도 하다.
이번 희망뚜벅이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해고 노동자의 움직임이다. 그저 앉아서는 고립된 채 희망을 구할 길이 보이지 않는 이들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다. 자본과 노동 사이 무너진 힘의 균형을 청와대가 언제까지 가만히 보고 있을 것인지를 묻는 일이다. 희망뚜벅이를 다룬 기사들을 읽어 내리며 <봄바람 프로젝트> 시리즈가 떠오른 건 자연스런 일일 테다.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스틸컷
다큐이야기
순례도, 다큐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지만
첫 편 <봄바람 프로젝트: 여기, 우리가 있다>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 나온 영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불러온 단절은 개별 투쟁 현장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다. 현장뿐 아니라 모든 뉴스와 관심이 팬데믹 상황에 쏠리는 언론 지형 가운데서도 이들은 고립된 채 무너져 갔다. 가톨릭 성직자이자 활동가이기도 한 문정현 신부가 봄바람 순례단을 꾸려 각지의 투쟁 현장을 찾았다. 순례단은 40여 일간 60여 개 현장을 찾는다. 이들 현장 가운데 세종호텔이 있었다. 다큐는 일회적 작업이던 순례를 영속하는 영상 기록으로 바꿔냈다. 그로부터 고립됐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이 용기를 얻고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또한 담겼다(관련기사:
비정규직 노동자 사연부터 기후위기까지, 6분에 담긴 고찰 https://omn.kr/2art3).
그러나 순례도, 다큐도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문재인에서 윤석열로, 다시 이재명으로 대통령이 바뀌었으나 해고 노동자는 여전히 해고 노동자다. 2024년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다시, 바람이 분다>가 제작된 것도, 다시 봄바람 순례를 떠올리게 하는 희망뚜벅이가 시작된 것도 그래서겠다. 나는 이제와 다시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다시, 바람이 분다>를 돌아본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여러 문제 또한 현재진행형임을 알아서다. 이들 작품이 제작 후 좀처럼 많은 상영 기회를 얻지 못한 채로 언급조차 되지 못한 채 잊혀가는 것이 안타깝기도 한 때문이다.
영화의 첫머리, 학교 성폭력을 공론화했다 부당하게 전보 당한 30년차 사회 교사 지혜복이 응원차 자신을 찾은 동지들에게 외친다. "투쟁으로 인사드립니다. 투쟁!"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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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현장을 이어내려는 작업
싸울 투(鬪)에 다툴 쟁(爭), 싸우고 다툰단 투쟁이란 말이 어느 때보다 어색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그건 지 교사의 저항이 싸움이나 다툼처럼 다가오지 않는 탓이다. 학교와 교육청은 학생들이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됐단 지 교사의 고발을 불편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사안을 축소하고 문제를 들춘 이를 다른 곳으로 보낸다. 이에 맞선 지 교사의 선택은 피켓을 들고 처분을 취소해 달라 요구하는 것이다. 동등한 처지에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아니다. 짓밟으려는 폭력에 '악!'하고 외침 한 번 내지르는 일이다.
떠올리면 다른 투쟁 현장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또 자본이 폭력이라 해도 좋을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부당한 감사와 징계, 지원 중단, 무단 개발사업이 진행된다. 정작 공권력이 필요한 곳은 버려두고서 사고가 나면 진상을 은폐하기 급급하다.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같은 약자는 부당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 이런 세상에 박차고 일어나서 바꾸어 내려는 목소리를 투쟁이라고 하는 건 어딘지 민망하다. 먼저 해한 적 없이 당한 뒤 일어난 저항이기 때문이다.
전작, 즉 <봄바람 프로젝트-여기, 우리가 있다>도 비명으로부터 출발한다. 봄바람 순례단을 이끌고 전국 각지 저항의 현장을 찾은 문정현 신부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뭍에서 들려온 비명을 외면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가 찾은 현장, 수많은 기록 활동가의 제작 영상을 이어 붙여 한 편의 장편으로 만든 게 바로 이 영화다.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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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그로부터 2년 뒤, 세상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봄바람 시즌2: 다시 바람이 분다>가 그 답이 될 수 있을 테다. ▲지혜복 교사의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강원도교육청이 혁신학교를 감사해 교사들을 부당하게 징계한 사례, ▲정부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도 시민사회를 지켜나가려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차례로 비춘다. ▲밀양 송전탑 문제가 1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리고, ▲가덕도와 ▲제주도 공항 건설 계획이 얼마나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는지를 살핀다. ▲이태원 참사 속 국가 책임을 재차 조명하고, ▲정권에 뿌리내린 뉴라이트 역사관과 반공주의 문제를 비판한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을 환기하는 한편, ▲장애인 평생교육법 제정의 필요, ▲이주노동자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의 해소 또한 촉구한다. 피켓을 들고 행정 소송을 내며 크레인에 오르고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꾸준히 들려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본의 논리가 사람을 짓밟고 법과 국가는 거들 뿐 막으려 들지 않는다.
전작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영화다. 각 8분 내외의 짤막한 다큐멘터리 11편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한국 사회의 각기 다른 문제를 조명한단 점은 같다. 달라진 건 전작의 중심이 됐던 봄바람 순례단 없이 이야기를 시작한단 것이다. 이 점에서 <봄바람 시즌2>는 서로 다른 주제와 형식을 가진 짧은 다큐를 한 데 묶어 상영하는 일이 유효한가를 따져보는 작품이 된다. 순례를 통한 잇기가 없는 채로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기 다른 현장과 문제 의식을 가진 작품을 한 데 묶어내는 작업이 적절하냐를 논해볼 수 있는 일이다.
시즌2를 표방했지만 순례단은 어디에도 없다. 11편의 작품 가운데 저항의 현장이 아닌 곳도 있고, 단순한 주의주장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 교육과 개발, 시민사회와 저항의 현장이란 점에서 나름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손 잡으면 죽지 않으니까 온빛', '사상 전쟁', '향아에게'처럼 모두가 그와 긴밀히 엮이는 것은 아니다. 지난 정권 아래서 생긴 문제도 일부 있으나 그 전 혹은 진보 정치며 진보 인사의 책임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할 건도 적지 않다. 다만 이 모두가 한국이란 국가, 또 한반도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부정의를 지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제작 당시의 윤석열 정권을 겨냥해 모든 작품을 한 데 묶어내려 든다.
서로 다른 투쟁 현장을, 그 모두가 지난 정권이 촉발한 것이 아님에도 윤석열을 겨냥하는 방식으로 묶는 것이 적합했을까. 영화가 연속성 있는 대한민국 정부, 일관성 있게 작동해 온 체제 그 자체보다도 윤석열과 지난 정권을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단 사실이 이 질문을 묻도록 한다. 순례단이 사라진 자리를 특정 정권에 대한 책임으로 채운 선택이 봄바람 프로젝트를 더 나아지게 하는가.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필자가 김환태 총감독(오른쪽)과 가진 감독과의 대화 모습오지필름
어느 정권이 아닌 대한민국의 이야기
<봄바람 시즌2>의 미덕은 차라리 현장과 관객 모두의 고립을 풀고 현장과 삶의 터전을 잇는 본래의 기획의도에 있다고 보아야 할 테다. 투쟁 현장을 찾아 잇는 일의 중요성을 알린 첫 작품이 그러했듯이, 시즌2 또한 제 현장과 삶의 터전을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 사이를 잇고 맺어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누군가는, 고백하자면 나 또한 세상에 있는 줄도 알지 못하였던 문제를 여럿 알게 되었다. 또 누군가는, 고백하자면 나 자신 또한 그를 보다 상세히 알아보고 관심을 두게 될 것이다. 각각의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러닝타임일지라도 애써 그를 편집하여 한 편의 영화로 묶어내는 작업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아무리 매서운 겨울일지라도 뒤엔 반드시 봄이 온다. 인간은 수많은 겨울을 겪어낸 뒤 마침내 봄바람이 겨울을 이겨낸다는 사실을 배웠다. 봄바람 순례단을 이끈 문정현 신부는 2011년 강정 해군기지 전면 백지화를 외치며 강정마을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 끝이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해군기지는 완공됐고 인근 바다는 황폐화됐다. 제주는 평화의 땅에서 군 전략기지로 변모했다.
그러나 강정의 저항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는가. 강정에서 출발한 첫 봄바람 프로젝트가 한파 가운데 놓인 전국 저항의 현장을 두루 살피기까지는 강정이 이룩한 역사가 자리하지 않는가. 그로부터 고립돼 활기를 잃어가던 이들에게 봄바람을 불어넣고 부족할지언정 매서운 현실을 녹이려는 작업이 이어지지 않았나. 어느 못난 정권을 향한 칼바람이 아니라 현장과 현장을 잇는 봄바람으로 이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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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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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뚜벅이'의 걸음 앞에 떠오른 영화 한 편, 봄바람 일던 날을 기억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