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거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디거는 적어도 제 삶 전체에서 인식을 만드는 이였지 받아들이는 존재로 산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주디가 아니라 세르게이가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믿음은 사실이고 인식은 세계니까. 그러나 가네시의 세계에선 그럴 수가 없다. 인식은 인식이고 진실은 진실이다.
인간이 직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을까. 물리학에선 양자역학의 장이 열렸을 때가 아마도 그와 같은 중차대한 순간이었을 테다. 물질은 어떻게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수 있을까. 그러나 실험은 하나의 존재가 두 가지 존재 형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삼차원의 공간에 사는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은 그보다 낮은 차원들뿐이지만, 과학은 아무리 못해도 10차원의 세상, 시간의 축을 더해 11차원까지가 존재한다는 걸 알린다.
인제 와 AI가 끝없이 확장해 가는 문명의 영토는 그렇게 인류의 인식 범위를 훌쩍 넘어섰지만, 우리는 그를 거부하는 대신 덮어놓고 믿으면서 인류의 답안지 위에다 AI가 구해온 답을 적어 넣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실제는 실제다. 인식이 아니다.
한때는 균도 식물이라고 했다. 바이러스는 그저 돌멩이나 다름없는 입자일 뿐이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광물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연속적 체계는 결코 생물과 무생물이란 확고한 이분법적 틀로써 설명되지 않는다고 한 뒤, 그보다 현명하다고 믿은 수많은 지성이 그를 우습게 여겼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과학이 확인케 하고 있다. 어쩌면 다른 어떤 시각에선 인간 또한 살아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저 프로그램, 로봇, 데이터, 아니면 또 무엇일 수 있을까.
그래서 가네시는 외치는 것이다. "인식은 인식이에요(Perception is just perception)!"라고. 이 대사는 <디거>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주고받음이고, 아마도 올 한 해 영화판에서 나온 가장 주요한 대사일 테다. 물리학과 바이러스, 과학과 인문, 또 인류와 AI가 기묘하게 조우한 현 문명의 최전선에서 강렬한 시사점을 주는 대화이니 말이다.
1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된 <훔볼트 USA>를 제한다면, 올해 한국에서 상영된 가장 지적인 영화가 <디거>라 해도 좋겠다. 여러모로 통하는 바 있는 두 작품은 완전히 상반된 방식으로 문명의 실패를 고발한다. <훔볼트 USA>가 현재적 다큐멘터리로 연결 지어낸 것을, <디거>는 미래 SF적 코미디로 끊어낸다. 그러나 두 작품이 겨냥하는 바는 오롯이 하나니, 실패하는 문명과 다가오는(혹은 이미 닥쳐온) 절멸에 대한 것이다.
인류의 실패를 부른 이의 당당함 앞에 서면
▲디거스틸컷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비할 데 없이 독특한 궤적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두드러진 작품으로 기록될 만하다. <디거>는 전에 본 적 없는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연설이라 여긴다. 영화를 가장한 연설이라고 말이다.
영화는 영화 안에 창작극을 담은 메타 영화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화는 미래 어느 시점에서 제작하는 한 편의 연극, 리허설과 초연에 이르는 가장 극적인 순간을 담는다. 말하자면 앞의 디거는 실재했던 디거가 아니다. 디거는 영화 기준으로는 과거에, 영화를 보는 우리보다는 미래에 살다 죽은 인물이다. 그 디거와 그를 둘러싼 실존 인물들, 그리고 이들이 불러온 비극을 이 영화 속 창작극이 다룬다.
<디거>와 같은 메타 영화엔 선명한 효과가 하나 있는데, 탁월한 작가 가운데 이를 외면한 이를 나는 이제껏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건 바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극 중 진실과 극중극으로 이분 되지 않는 통상의 영화에서 관객은 서사와 결합해 좀처럼 그와 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극중극이 삽입되면 관객은 극중극과 그 바깥의 진짜, 그조차 영화를 보는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겠으나, 아무튼 실제 세상을 구분하게 된다.
그 불필요한 이분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서사와 멀어지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멀어진 바로 그 지점에 관객의 독자적 사고가 싹틀 여지가 생긴다. 영화가 관객을 압도하며 끌어가는 대신, 관객이 한 걸음 떨어져 극중극을 배치한 이유 따위를 생각하게 된다. 이창동의 <가능한 사랑>과 같은 작품이 의도한 것 또한 바로 이것이겠다.
인류의 실패를 다룬 작품이다. 문명은 몰락했다. 디거가 상징하는 미국과 유럽, 대항해시대와 그것이 불러온 자본주의가 주도한 개척과 개발의 방식이 실패와 몰락을 가져왔다. 그건 필연적이다. 디거가 땅을 파고, 과학을 고용하고, 그 경고를 우습게 무시하며, 정치를 타락하게 하는 것 모두가 차라리 자연스럽다. 디거는 디거 대로 살았고, 디거처럼 죽는다. 그래서 당당하다.
정직하고 용감하며 탁월하다
<디거>는 멋진 영화다. 여전히 인식이 실제라며 호도하는 현실보다도 더 정직하다. 저도 모르는 새 전쟁과 기후 붕괴, AI가 가져올 수 있을 위태로움 앞에 인류를 끌고 온 문명은 단 한 번도 솔직하게 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욕망을 드러내고 이상을 펼쳐내며 제 표정으로, 목소리로 우리 앞에 선 적이 없다. 그래서 대중 또한 그를 대면하여 우리 자신의 비루함과 무력함을, 무능함과 한심함을, 타락과 비겁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해낸다. 우리 앞에 문명의 얼굴을 보이고, 목소리를 들려준다.
<디거>는 정말이지 제목 그대로 우리 문명과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겠다 파고든다. 제 역량이 닿는 한 힘껏 파 내려간다. 이따금 말 그대로 삽질을 하는 순간도 없지 않지만, 그게 뭐가 중한가 싶을 만큼 야심 차고 도전적인 작업이다. 폭풍의 곶을 건너고 북극 항로를 발견하며, 세계 일주에 도전했던 수많은 항해사에게 고작 위·경도 몇도 계산이 틀렸다고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걸작 앞에 그 아쉬움 따위를 언급할 필요도 가치도 없겠다.
애써 희망을 놓아두고 그를 구하는 결말이 심심하다 하는 이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리하여 나는 구태여 이 영화의 진짜 결말을 또한 적으려 한다. 영화는 결말 뒤 엔딩크레딧에서 1970년대풍의 포크송을 삽입한다. 너무나 낭만적인, 지난 시대 지성과 이성으로 역사와 문명을 바꿔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제는 낡고 늙어버린 시대의 음악이다.
그러나 이 음악을 영화는 아무렇지 않게 뚝 끊어버린다. 마치 영화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이제는 현실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극중극인 연극이 끝나고 재앙적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같이 극장 안의 우리 관객들 또한 현재진행형인 실제를 마주한다. 전쟁과 기후붕괴, 인류의 주도권을 앗아갈지 모를 AI 기술의 발전 앞에 디거처럼 나아가는 현실을 말이다.
나는 여기 적는다. <디거>는 참으로 지적인 영화다. 상식이 몰락하고 지성이 고꾸라지는 이 시대에, 대중의 눈높이에 아부하거나 스스로를 가두는 좁은 비평가들을 유인하는 비루한 작품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여봐란듯이 다른 길을 간다. 이처럼 높은 이상과 탁월한 실력, 배짱이 맞물린 영화는 흔치 않다. 기꺼이 엄지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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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