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 철이는 왜 관리인 아저씨를 따랐을까?

건널 수 없는 계급의 강 너머에 있는 사람들... 배우 설경구 연기 명불허전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가능한 사랑> 부유한 다큐감독 예지는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영화 <가능한 사랑>부유한 다큐감독 예지는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넷플릭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먼저 하자면, 영화 <가능한 사랑>을 보는 내내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가 해고 노동자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을 촬영하는 모습이 묘하게 나의 현실과 겹쳐 보였다.

부부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을 때마다 예지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카메라의 녹화 상태를 확인한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한 순간에도 그것을 어떻게 화면에 담을지, 어디에서 '좋은 그림'과 '결정적인 컷'을 만들어낼지를 본능적으로 계산하는 모습에서 부끄럽지만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현장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는 나와 동료 PD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세 겹의 이야기를 포개놓는다. 대기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이 서사의 뼈대를 이루고, 투쟁과 수감 생활을 거치며 피폐해진 호석의 삶과 부부의 과거가 그 위에 두터운 살을 붙인다. 그리고 그들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와 상우 부부의 삶이 또 하나의 층위를 이룬다. 서로 다른 두 부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계급적 거리감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핏줄이다. 그 모든 이야기를 감싸는 것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주제이다.

타인의 고통을 사랑할 수 있는가

영화 <가능한 사랑>은 키에슬롭스키의 '십계명 연작'을 잇는 프로젝트의 한 작품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에게 주어진 주제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였다. 문제는 이 계명이 영화 속 네 인물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그 구현 방식이 완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외제차를 타고 수백만 원짜리 옷과 가방을 걸친 예지는 해고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사연을 카메라에 담는다. 타인의 고통조차 자신의 창작을 위한 재료로 탐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야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욕망은 거의 창작자의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지는 노동자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영화와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감독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오히려 노동의 가치와 그 이면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남편 상우에게 더 선명하다.

카타르의 화려한 마천루를 바라보며 그 건물을 세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 눈물을 흘렸을 노동자들을 떠올리는 사람. 전용 해변과 숲을 품은 별장을 상속 받았고 스스로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의 숭고함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사람. 말하자면, '강남좌파'의 전형 같은 인물이다.

예지는 출연자와의 경계를 허물겠다며 일부러 거친 비속어까지 섞어 쓰면서 미옥을 살갑게 대한다. 그 친밀감의 껍질 속 내면을 들여다보며 남편 상우는 말한다.

"넌 저 사람들하고 달라. 지금 그들과 같은 사람인 척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야."

그 말에 아프게 찔린 예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항변한다.

"아냐, 난 저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난 다큐멘터리 감독이니까."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노동의 가치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창작의 재료로 사용하는 창작자의 일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남의 고통을 창작의 소재로서 탐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진실로 사랑하려는 마음,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가능한 사랑'은 그 자체로 반어이자 물음표이다.

섞일 수 없는 두 계급 사이의 간극

영화 <가능한 사랑> 섞이기 어려운 두 계급 사이의 간극
▲영화 <가능한 사랑>섞이기 어려운 두 계급 사이의 간극넷플릭스
아무리 선의를 품고 허물없이 다가가 자신의 별장으로 가족을 초대한다 한들, 두 부부 사이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계급의 선이 존재한다. 감독은 이를 종종 화면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으로 시각화한다.

미옥은 남편 호석이 숲속에서 홀로 토해내는 울분을 숨어서 보며 가슴 아파한다. 그런데 예지가 호석과 자신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녀는 자신들의 고통이 예지의 창작물로서 대상화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사랑과 연대라고 믿었던 관계의 껍질이 벗겨진 것이다.

남은 것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다. 때문에, 미옥과 상우의 바닷가 신은 분노한 미옥의 도발로 보인다. 그에 대한 상우의 반응 역시 탐심의 표현이라기보다 순간적인 욕망의 발현으로 보였다.

해고 노동자 호석이 탐한 남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 이르면 이 주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더욱 모호해진다. 그는 남의 것을 탐하긴커녕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죽은(해고된 노동자)' 사람이다. 그가 탐한 것은 '산 자(해고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이 누리는 지금의 안정적인 생활인데, 이를 탐심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갖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오히려 네 인물 가운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사람은 호석과 미옥의 아들 철이인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아빠 호석과 달리, 세련된 상우는 다정하게 자신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태권도를 가르치며 마치 삼촌 같은 역할을 한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이런 친절한 부자 아저씨를 따르고 가까워지려 애쓰겠지만, 철이는 오히려 별장 관리인 아저씨 곁을 더 맴돈다. 비록 어리지만 감각적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와 상우 부부의 세계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같은 냄새를 풍기는 노동자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가능한 사랑> 노동자의 아들 철이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영화 <가능한 사랑>노동자의 아들 철이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넷플릭스

한 장면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영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주제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은 여전히 거장의 솜씨를 전혀 잃지 않았고, 그의 영화는 이전보다 더 웅숭깊고 단단해졌다. 그 깊고 단단한 내공을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대중에게 좀 더 친절해진 화법으로 전달하고 있다.

수많은 직업군의 일자리가 AI로 대체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노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이토록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귀하고 귀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을 창작의 대상으로 삼는 창작자(이창동 감독 본인을 포함하여)에 관해 메타인지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기존의 유사한 영화들과 차별화 되는 지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단 한 장면도 허투루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호루라기와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별장 숲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새의 신비한 소리, 그리고 보름달. 영화를 더 관람한다면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이 영화는 풍부한 메타포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보름달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연애 시절 월미도 밤하늘 아래, 호석과 미옥이 함께 바라 본 달은 온전히 충만한 사랑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두 부부의 파국 이후 미옥이 예지에게 보름달 사진을 전송하려다 마는 장면에서는, 영화가 마치 건널 수 없는 계급의 강 너머로 과연 사랑이라는 형태의 보름달이 뜰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 같다.

표정만으로도 인물의 정확한 심리를 표현해 내는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다. 특히 설경구가 왜 대체 불가능한 배우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물론, 함께 투쟁했던 동료들의 배신 앞에서 무너져 내린 한 인간의 피폐함. 그 환멸과 피로를 깊은 슬픔이 고인 눈빛과 굽은 어깨로 체화해내는 그의 연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가능한사랑 해고노동자이야기 창작자 계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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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방송작가. <SBS 스페셜>, <KBS 환경스페셜>, <EBS 다큐프라임> 등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냉철한 시선으로, 사람은 따뜻한 가슴으로 보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