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 곡을 듣는 동안에는 그저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 불이 켜지면 우리는 조금 전까지 듣고 있던 음악이 아니라 그 음악이 불러낸 사람과 시간과 기억을 떠올린다. 어떤 목소리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아 있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세종예술의전당에서 테너 나대주의 독창회를 들으며 나는 오래전 젊은 시절의 엄정행 선생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한국 가곡의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한때 엄정행과 백남옥은 그야말로 가곡계의 아이돌이었다. 두 사람이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객석의 공기가 달라졌고,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어쩌면 그 시절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러 간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에 취하러 갔는지도 모른다.
목소리에는 사람마다 다른 결이 있다. 음정과 호흡을 배우고 발성과 기술을 연마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만의 떨림과 숨의 길이, 모음의 색깔까지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 그래서 목소리는 가수의 지문과도 같다.
다만 오늘 나대주의 무대에서 내게 더 강하게 다가온 것은 그 '지문' 자체가 아니라, 그 목소리가 다른 예술과 만났을 때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이었다.
낯섦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 '시인의 사랑'
▲지난 22일 세종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테너 나대주 독창회 포스터세종시문화관광재단
1부에서 나대주는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연극배우 이제석과 함께 풀어냈다. 성악가가 음악으로 노래하고 배우가 언어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형식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익숙한 성악 독창회라면 오롯이 가수의 목소리와 피아노 반주에 귀를 기울였을 텐데, 이날은 노래와 연극적 언어가 한 무대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낯섦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슈만의 음악이 품고 있는 시의 정서가 나대주의 목소리를 통해 흐르고, 이제석의 언어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쪽이 노래하면 다른 한쪽이 말을 걸고, 노래의 여운 위에 배우의 언어가 놓이고, 다시 음악이 그 말을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화음이 의외로 아주 잘 어울렸다.
음악과 연극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같은 곳을 향한다. 이날 「시인의 사랑」은 단순한 연가곡 연주를 넘어 한 편의 작은 음악극으로 다가왔다. 특히 성악가의 목소리와 배우의 목소리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준 점이 좋았다. 나대주의 노래가 감정을 열어놓으면 이제석의 말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배우의 언어가 이야기를 밀어가면 다시 성악의 선율이 그것을 감싸주었다.
낯선 시도였지만, 낯설기 때문에 새롭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음악이 반드시 익숙한 방식으로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다채로운 앙상블과 가곡의 향기, '잔향'
2부에서는 무대의 분위기가 한층 다채로워졌다.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의 독주와 협연이 이어졌고, 독창회라는 큰 틀 안에서 기악의 색채가 더해지면서 나대주의 목소리를 다른 각도에서 들을 수 있었다.
성악은 혼자 빛나는 예술처럼 보이지만 사실 좋은 반주는 가수의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피아노의 울림 사이로 목소리가 떠오르고, 첼로와 바이올린의 현이 그 목소리와 만나면서 무대에는 하나의 큰 앙상블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연의 후반부에는 우리 가곡 세 곡이 이어졌다. 어쩌면 이날 관객들에게는 일종의 팬서비스였을 것이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지나 다시 우리의 언어와 정서로 돌아오니 객석의 분위기도 한결 편안해졌다.
특히 '잔향'이 인상적이었다. 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그 노래에서는 두고 온 여름과 다가오는 가을의 향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여름은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바람에는 가을의 기척이 섞여 있는 계절이다. 그 미묘한 경계의 감정이 '잔향'이라는 제목과도 잘 어울렸다.
사라진 소리가 남기는 것, 기억과 시간의 회복
지나간 것은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름은 떠났지만 그 여름의 냄새가 남아 있고, 지나간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이 남긴 목소리는 어딘가에 남아 있다. 계절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다.
한 음은 연주되는 순간 사라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라진 소리가 가장 오래 남는다. 음악은 본래 가장 빨리 사라지는 예술이다. 한 음을 붙잡는 순간 이미 그 음은 지나가 버린다. 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연주는 끝나며 무대에는 침묵만 남는다.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음악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음악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대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래전 엄정행의 목소리가 떠오른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시대의 목소리를 불러냈다. 나는 오늘의 객석에 앉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오래전의 객석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의 무대와 조명, 젊었던 나, 그리고 그 시절의 목소리가 함께 떠올랐다. 음악이 시간을 없애버린 것이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갔다. 그의 노래는 인간뿐 아니라 짐승과 나무와 돌까지 움직였다고 한다. 음악이란 어쩌면 살아 있는 것만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것까지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인지 모른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줄 수는 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의 감정을 다시 불러낼 수는 있다. 오늘 나대주의 목소리가 내게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젊은 성악가의 노래가 오래전의 기억을 깨웠고, 과거의 감동이 다시 현재의 감각으로 번져왔다.
예술은 새로움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음악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깨우고, 한 시대의 감동이 다음 시대의 감각 속에서 다시 살아날 때 전통은 비로소 현재형이 된다. 오늘의 무대에서 특히 반가웠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라는 서양의 고전과 배우의 언어가 만나고, 피아노와 첼로와 바이올린이 성악과 어우러지고, 마지막에는 우리 가곡으로 돌아왔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와 언어가 한 무대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테너 나대주의 목소리가 있었다.
목소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목소리가 남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목소리는 한 곡을 기억하게 하고, 어떤 목소리는 한 사람을 기억하게 하며, 어떤 목소리는 한 시대를 기억하게 한다.
음악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한 번 경험한 황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면 약효가 끝난 것 같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작용하기 시작한다. 한 곡이 끝났을 때 찾아오는 침묵이 일종의 금단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다시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돈을 내고 들을 수는 있지만 돈으로 만들 수는 없고, 한 번 들으면 끝나지만 약효는 수십 년을 가기도 한다. 사람은 늙고 계절은 지나가며 시대도 바뀌지만, 한때 우리 안에 들어온 음악은 기억 속에서 좀처럼 늙지 않는다.
한 젊은 테너의 독창회를 들으러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는 뜻밖에도 젊은 시절의 나와 오래전의 엄정행을 함께 데리고 나왔다. 나대주의 목소리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기억을 깨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합법적 마약인지도 모른다. 그 마약은 우리를 취하게 하지만 망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잊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목소리가 그 기억을 건드리는 순간, 지나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이날의 '잔향'처럼.
여름은 이미 지나갔지만 그 향기는 남아 있고, 음악은 끝났지만 그 목소리는 아직 남아 있다. 결국 음악이 남기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잔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잔향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오래전의 나를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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