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청년들과 자리를 가진 일이 있었다. 동료 영화평론가, 또 서평가들과 생각을 나누는 일이 잦았음에도, 비평이란 무엇인가 정면으로 물어오는 질문들에 딱 잘라서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의 지론을 펼치면서도 나의 비평론과 상대의 기대며 정의가 꼭 부합하지 않는단 생각이 마당에 솟는 죽순처럼 불편하게 일어났다. 그때였다. 문득 수년 전 어느 형사와 영화 한 편을 두고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평론에 있어서 뛰어난 자질이 수사와도 아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그때 처음 들었다. 증거를 확보하고, 가설을 설정하며, 편견과 편향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분석 및 추론을 거듭하는 능력, 그와 같은 역량이 하나하나 뛰어난 수사관의 자질이라고 했다. 이때 빼어난 직관과 통찰이 절대적이진 않아도 유능함의 기준점이 되고는 하는데, 평론 또한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했던 구체적 사례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끔 했단 건 놀라운 일이다. 과연 수사와 비평 사이엔 통하는 구석이 많다. 그리고 가만히 돌아보자니 취재 또한 마찬가지다.
좋은 수사관도, 냄새 잘 맡는 기자도 어디에서 걸음을 멈추고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를 안다. 탁월한 비평가는 제가 본 작품 가운데 무엇이 주목해야 할 것인지를 안다. 어디서 생각의 가지를 펼쳐나가야 할 줄도 안다. 타고난 직관과 단련한 통찰로써 현상 아래 깔린 이면, 남들은 지나칠 법한 중한 것에 스스로를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 닮아 보이지 않는 수사와 취재, 그리고 비평이 통하는 지점이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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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그 명작, 한국 첫 개봉
프랑스 누벨바그 시대의 명작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가 한국에 첫 선을 보인다. 1974년에 제작된 영화가 9월 30일 개봉을 맞았으니 무려 반세기 넘는 시차를 두고서 한국 관객에게 관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누벨바그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 중에서도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평을 들은 자크 리베트의 작품이다. 영화 속 영화, 혹은 영화 만들기가 등장하는 메타픽션으로, 단순한 서사가 아닌 매체의 형식에 대한 관심을 둔다는 것도 그 영화의 특징이라 하겠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리베트의 특징이 그대로 녹아든 작품이다. 이야기는 몽마르트르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줄리(쥘리에트 베르토 분)가 그 앞을 지나던 여자 셀린느(도미니크 라부리에 분)가 흘린 물건을 주워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줄리가 소리를 치며 셀린느를 불러도 그녀는 도대체가 멈출 기미가 없다. 파리 중심을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듯한 모습이 마치 첩보영화의 추격전을 보는 듯 느껴지기까지 하는 건 이 영화가 선보이는 독특한 세계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영화는 줄리와 셀린느의 만남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생경한 관계맺음을 내보인다. 셀린느는 카바레에서 공연을 하는 마술사다. 줄리는 도서관 사서다. 두 사람이 교류하며 빚어내는 독특한 조화로움은 수시로 보는 이에게 당혹감을 준다. 줄리는 어째서 셀린느에게 끌리는가. 셀린느는 왜 줄리 곁을 맴도는가. 두 사람이 서로의 일터에서 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하고 어째서 이뤄지나. 보는 이의 상식을 깨는 순간들은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가 관객이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이 작동하는 환상, 혹은 꿈과 같은 공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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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런 영화 처음이야
그런데 도대체 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그와 같은 의문과 대면한다.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 모두가 좀체 기존의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는다. 감독은 어째서 이와 같은 상황을, 극을, 영화를 꾸며낸 것일까. 그로부터 얻고자 하는 효과가 무엇인가. 진짜 하고자 한 말은 또 어떠한 것인가. 이와 같은 의문이 과연 의미는 있는 것일까.
누벨바그는 영어로 적자면 'New Wave(뉴 웨이브)', 새로운 흐름을 뜻하는 말이다. 프랑스 영화계에서 일어난 이 사조는 기존 영화의 정형화된 작법에서 탈피해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 대표주자인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같은 이들이 오늘의 영화에 끼친 영향을 몹시 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비평가, 또 서구 비평의 유산에 빚진 이들 중에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틀린 것은 아니다. 오늘날 영화가 그저 문학의 영상화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매체, 또 예술의 수단으로 자리한 데는 영상과 편집, 소리와 연기 등 영화를 구성하는 제 요소가 독자적인 표현방법으로 쓰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들 일군의 감독에겐 서사 또한 가능성을 도모하는 장이 됐다. 소위 기승전결, 극작의 오랜 방법론에서 벗어난 이야기도 얼마든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기꺼이 영화매체 안에서 실험되었다. 셀린느와 줄리의 온갖 놀이들이 어째서 등장하는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는 감독에게도, 관객에게도 주요한 관심이 아닐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겐 중요한 요소일 수 있겠다. 이 모두가 중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누가 있어 그 답을 확정할 수 있을까.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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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는 답이 있는가, 영화는 어떤가
자, 서두에 적은 비평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형사는 내게 말했다. 직관과 통찰이 주요한 역량이란 점에서 비평과 수사는 닮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돌아보자면 둘 사이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수사에서 직관과 통찰은 대체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다. 제 직관과 통찰이 얼마나 뛰어나고 또 얼마만큼 형편없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러나 비평은 어떤가. 비평에 답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가 훌륭한 영화라고, 혹은 과대평가된 졸작이라고,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그렇고 그런 작품이라 말한다. 그리고 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자기와 같은 평가며 해석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영화, 나아가 예술은 확정된 가치를 갖는지를 돌아본다. 만약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탔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 타지 못했다면 영화와 제작자, 혹은 베니스, 또 패기넘치는 페미니스트 감독 매기 질렌할을 심사위원장으로 기용한 선택은 실패인가. 내게 탁월한 작품이 다른 누구에겐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다른 누구는 틀리고 나는 맞거나 그 반대의 문제여야 할까. 너는 영화를 보는 눈이 그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하고, 아쉬워해야 할 문제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포스터라이트하우스
뛰놀 수 있는 만큼 놀아봐라
하고픈 말은 이것이다. 예술은 열려 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존재하는 예술, 또 영화에 있어서 비평은 결코 수사나 감정과 동의어일 수 없다. 예술은 내게 절대적일 수 있으나 타인에게도 그렇다. 300명의 관객이 있다면 300개의 절대적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그 감상과 해석엔 심지어 창작자조차 제멋대로 침범할 수 없다. 수용자가 허용한 꼭 그만큼만 들어와 제 의견을 펼쳐낼 수 있다.
요컨대 내게는 원통형인 것이 다른 누구에겐 긴 호수일 수 있다. 코끼리 다리와 코끼리 코 모두가 코끼리의 일부다. 그 모두가 틀리지 않다. 그렇다고 온전히 옳은 것도 아니다. 모든 수용자는 각자의 시간과 공간 선 안에서 제한된 경험과 시야, 서로 다른 취향과 감각으로써 작품과 마주한다. 그 결과가 내가 본 영화와 네가 본 영화의 차이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마땅한 일이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그 많은 다름을 기꺼이 작품 안으로 초대한다. 졸작과 걸작이란 비평이 모두 가능하고, 비좁거나 드넓다는 해석 또한 펼쳐질 수 있겠다. 더없이 지루할 수도 시종일관 흥미진진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영화는 세상에 그리 많지가 않다. 이 영화가 그다지 탁월하다고는 여기지 않는 나와 같은 관객조차 그 자유로움을 인정한다. 그러고 보면 그 자유 안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태어나기도 한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감독의 헌사라거나, 기존의 관성적 극작을 적극적으로 배반하는 시도들이라거나, 다른 건 모르겠고 그저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몇몇 장면들의 어여쁨 같은 것들, 심지어 관객의 의식을 돌려 마술처럼 재구성하는 영화적 가능성에 대한 예찬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나 스스로도 언젠가 그 모두에 경탄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일고여덟 어린 시절에 심형래 주연의 <영구와 땡칠이>를 세계 제일의 영화로 꼽았던 나는 오늘에 이르러 그와는 전혀 다른 작품에 감탄하고 박수를 친다. 나는 그 시절보다 나아졌는가, 혹은 그 반대인가. 비평이 해내야 할 건 우월함과 열등함을 구분 짓는 작업이 아니다. 관객 앞에 훌륭함과 탁월함을 보이고, 때로는 그 반대를 짚어내어, 결국엔 더 멀리, 더 깊이 보도록 이끄는 일 뿐이다. 마침내 제가 평하는 대상을 더 아끼도록 돕는 것이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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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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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 처음이야... 반 세기 만에 개봉하는 명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