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배우가 여성을, 다시 아내가 남편 연기…'장진 코미디'의 끝판왕

[안지훈의 연극 읽기] 연극 <꽃의 비밀>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트위스트1971 공연제작소, ㈜파크컴퍼니

장진 감독의 코미디 연극 <꽃의 비밀>은 2015년 초연 이후 꾸준히 공연되며 저력을 입증해왔다. 보험공단의 건강검진 전날 사라진 남편들을 대신해 직접 남장을 하고 남편 행세를 하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기발한 설정은 대사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장면을 쌓아가는 장진 감독의 스타일과 맞물려 10년 이상의 흥행 성과로 이어졌다.

기발한 설정과 장진 감독 고유의 스타일 외에도, 드라마를 놓치지 않은 코미디라는 점이 <꽃의 비밀>의 흥행을 돕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여성이 남장을 하는 유쾌한 설정 이전에 남편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며 갑자기 사라져버린 드라마가 있고, 그 이전에 네 명의 여성들이 각자의 남편과 쌓아온 드라마가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한 뒤 벌어지는 드라마가 있다. 그리고 드라마 군데군데 허를 찌르는 반전과 '툭' 던지듯 시니컬한 유머가 뒤섞여있다.

직전 시즌에도 관람한 바 있는 <꽃의 비밀>을 이번에 다시 본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난 20일 관람한 <꽃의 비밀>은 남자 배우들이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특별한 회차였다. 여성을 연기하는 남자 배우들이 다시 '남자 여자'를 연기하기까지, 무대 위에서 총 두 차례에 걸쳐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은 여성 배우들이 보여준 기존 <꽃의 비밀>과 분명 달랐다.

2026년 공연에서는 여성 배우들이 아내 역할을 맡는 기존의 방식과 더불어 남성 배우들이 아내 역할을 연기하는 새로운 방식이 함께 시도된다. <꽃의 비밀>이 공연된 지 11년 만에 변화를 준 셈인데, 사실 이런 구상은 장진 감독이 이 연극을 집필하던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장진 감독은 사전 인터뷰부터 제작 발표회에 이르기까지, 10년도 더 된 구상을 재차 직접 밝혔다.

"사실 처음에는 남자 배우들이 여장을 한 채로 시작하는 작품을 생각했어요. 관객들은 연극이 시작되고 여장한 남자 배우들이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보면서 어느 순간 '그들은 그냥 여자다'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따라오게 되죠. 그리고 그들이 완벽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과정까지, 우리가 만들어낸 무대의 환상이 관객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에서 시작했습니다."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트위스트1971 공연제작소, ㈜파크컴퍼니

발칙한 변장 소동극, 사기극인 동시에 반란이다

<꽃의 비밀>이라는 연극의 제목답게 극 중 여성들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네 명의 여성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각자의 남편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탈리아 북부의 시골 마을 '빌라 페로사'에 사는 네 여성은 남편의 가정폭력, 외도, 바람 등에 시달렸다. 사랑의 반대편에서 관계를 위협하는 요인들 속에서도 네 사람은 미소를 잃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물론 부부 사이의 일들은 비밀로 꽁꽁 감춰둔 채로.

이 비밀은 남자들이 축구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로 떠난다며 길을 나선 이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사고는 몇 가지 비밀을 추가로 드러내고, 또 새로운 비밀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남편들의 행선지가 토리노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는 사실, 교통사고가 예견된 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남장을 한 채 보험공단 의사 앞에서 남편 행세를 해야 하는 비밀이 또 하나 추가된다.

네 여성은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된 뒤 더 돈독해지고, 같은 비밀을 공유한 후로 일종의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사라진 남편을 대신해 직접 보험에 가입하고 보험금을 타기 위한 네여성의 소동은 유쾌한 사기극인 동시에 억눌려왔던 그간의 경험을 뒤엎는 저항이자 반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트위스트1971 공연제작소, ㈜파크컴퍼니

<꽃의 비밀>의 특별한 시도, 과연 그 끝은

<꽃의 비밀>은 사실적인 재현을 추구하는 연극이 아니다. 남편 행세를 하는 아내들의 변장술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수행하는 노력들(예를 들어 건들거리며 건네는 인사, 삐딱한 자세, 털털한 행동 등)은 사실적이라기보다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포인트에 가깝다. 보험공단 의사 '카를로'와 간호사 '산드라', 나아가 관객을 철저하게 속이려 들지 않고, 오히려 '이래도 속아준다고?' 하며 과감하게 나아간다.

남자 배우들로 꾸려진 공연은 한층 더 과감하다.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어딜 봐도 명백한 남성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 성지루가 연기하는 '소피아'가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객석 곳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자스민'을 연기하는 배우 정웅인, '모니카' 역의 강은빈, '지나' 역의 임모윤 역시 본래 성별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관객들은 기꺼이 속아준다. 어느 순간이 되면 머리로는 이들이 남자인 걸 알지만, 여자이길 바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덕분에 아내들이 남장을 한 이후에도 무대 위 남자 배우들은 '남자'로 보지 않고 '여장 남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극 중 여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해하며 소동을 지켜본다.

그야말로 '연극적 허용'이자 장진 감독이 이야기한 '환상'이다. 그는 남자 배우 버전의 <꽃의 비밀>을 구상하고 준비하면서 무대 위 환영의 끝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보고자 하는 환영의 끝은 작품 자체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 작품과 배우들의 역량, 관객의 시너지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과연 그 끝이 어디일지, 장진 감독의 실험은 오는 11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진행된다.

남자 배우들에 더해 정경순·추귀정(소피아 역), 황석정·유선(자스민 역), 박하선·경수진(모니카 역), 한수아·신슬기(지나 역) 등 여자 배우들도 고유한 <꽃의 비밀>을 완성하기 위해 힘을 보탠다. 안두호·김한결·김남희(카를로 역), 전윤민·서은영(산드라 역)도 출연한다. 11월 11일부터 15일까지는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가 섞여 출연하는 '페어셔플'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
▲연극 <꽃의 비밀> 공연 사진트위스트1971 공연제작소, ㈜파크컴퍼니
공연 연극 꽃의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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