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와 즐겁게 놀고 난 뒤의 일이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담긴 동영상을 본 다른 이가 내게 말하기를, 자기에겐 그 영상이 불편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내게 즐거운 기억이 어째서 그에겐 불편했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내가 영상 속 친구를 함부로 대하는 듯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영상에는 우리가 춤추고 소리치는 잠깐의 순간뿐이다. 대체 어디에서 불편을 느꼈는지 다시 물으니, 그가 체구가 작고 나는 그에 비해 큰 편이라서 그렇게 느낀 것 같다고 답해왔다. 어디 그뿐일까. 내 평소 태도나 기질 또한 그가 그런 결론에 이른 이유였을 테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하건대, 영상 속 나와 그 사이에는 다른 친구가 우려한 불평등도, 무례도 움틀 자리가 전혀 없었다.
베니스에서 둘째가는 상을 타고 돌아온 거장의 신작을 말하는 데 어째서 내 사사로운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의아해할 독자가 있을 테다. 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린다. 판단에 필요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을 때에도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저 인상과 감각으로 빈 곳을 채워 판단하려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은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작품이다. 그의 영화가 이따금 그러했듯, 많은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끝끝내 말하고 보여주지 않으므로, 관객은 제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할 위치에 선다.
바로 이 미묘한 지점이 <가능한 사랑>을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지,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바라볼지를 가름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다시 말해 영화를 주의 깊게 보는 이는 제가 판단하는 것과 판단하고 싶어 하는 것,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를 구분할 드문 기회를 얻는다.
▲영화 < 가능한 사랑 > 스틸컷
넷플릭스
영화 속 영화, 이창동과 노동 다큐
<가능한 사랑> 속 다큐멘터리 감독 이예지(조여정 분)는 노동자를 다룬 다큐를 찍으려 한다. 제작비 지원 프로그램에 나서 발표를 하고, 등장할 인물을 섭외해 실제 촬영에 나서는 과정이 영화를 가로지른다.
정규직 직원은 사장 가족 외 세 명뿐인 가족회사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안미옥(전도연 분)이 예지의 카메라 앞에 서는 건 필연일까, 우연일까. 어쩌면 그 모두가 운명이니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망자의 장례식장에서 미옥 부부가 예지의 눈에 들었다.
죽은 자는 해고 노동자다. 그는 죽기 전에도 동료들에게 '죽은 자'라 불렸다. 경영난 등의 사유로 사모펀드에 넘겨진 기업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파업으로 저항하는 노동자를 탄압하는 뉴스를 우린 지난 20여 년간 얼마나 자주, 또 많이 보아왔던가.
죽은 자도 그렇고 그런 해고 노동자였을 테다. 오랜 옥쇄파업에도 끝내 해고를 되돌릴 수 없었고, 기물 파손 등 손해배상 연대책임을 져 빚더미에 오르고 가정까지 파탄이 난 그렇고 그런 해고자 말이다. 그래서 알 만한 이들은 저항하지 않고 회사에 계속 다니는 직원을 '산 자'라 불렀다. 미옥의 남편은 그래서 살았으나 죽은 자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죽은 자 말이다.
예지는 내심 미옥의 남편 최호석(설경구 분)이 자기가 찍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 일은 도무지 이뤄질 것 같지가 않다. 파업 이후 마음이 크게 다친 호석은 다른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은 채 몇 년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지냈다. 호석에게 마이크를 채워 카메라 앞으로 끌어내는 게 예지가 만들려는 영화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예지와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예지의 다큐 감독으로서의 역량이다. 그리고 예지에겐 다른 흔한 다큐 감독이 갖지 못한 무기가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번뜩이는 무기가 바로 남편 상우(조인성 분)다.
저 <파묘>가 '그냥 부자'라고 묘사했던 부유함의 표상이자, 그 스스로도 세련되고 능력 있는 존재인 상우는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이에게든 그런 눈이라곤 전혀 없는 무지몽매한 이에게서든 한 번쯤 '스티브 잡스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법한 존재감 있는 이다.
▲영화 < 가능한 사랑 > 스틸컷
넷플릭스
백마 탄 왕자님과 헐거운 반지 사이
예지의 말마따나 호석은 '한국에 단 한 명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자기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겠다는 예지에게 상우는 '알고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해고 노동자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많은 관객이 상우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첫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일 수 있다. <기생충> 속 동익(이선균 분)이 사람을 가름하는 '냄새'를 언급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동익의 곁에서 순진하게 순수했던 연교를 연기한 배우 조여정이 이번엔 교묘하게 순수한 예지를 연기하도록 한 건 이창동 감독이 놓은 각별히 흥미로운 한 수다.
상우는 예지가 청할 때마다 포르쉐를 몰고 나타나는 '백마 탄 왕자'님이다. 미옥에게 호석이 '어느새 헐거워져 언제 빠질까 두려운 반지'인 것과 대비된다. 포르쉐의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라면 결코 먼저 헐거워질 일 없으리란 환상마저 품도록 한다. 적어도 영화 속 예지와 미옥 같은 여자라면 그럴 것이다.
<가능한 사랑>은 무형문화재 광대처럼 신묘하게 줄을 탄다. 사랑이 아닐 것을 알면서도 사랑처럼 보이고, 사랑이다 싶은 순간 사랑일 수 없는 쪽으로 돌아선다. 예지와 상우 부부가 미옥과 호석 부부와 어울리는 과정은 자연스럽고 그만큼 위태롭다.
결정적 순간은 알몸 수영이다.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 상우다. 3대째 소유했다는 특별한 별장에 미옥 부부를 초청하고선 어릴 적 발가벗고 수영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 말에 오로지 미옥만이 같은 방향으로 호응한다.
그건 자유다. 철없던 시절의 발가벗음이 아니라, 온전히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진짜 자유다. 그러나 미옥은 헐거워도 호석의 아내이고 상우는 빠르지만 예지의 남편이다. 그 잘나고 매력적인 사내의 앞에서 그의 바다 속으로 잠겨드는 맨몸의 미옥은 누구인가. 그녀는 부끄러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는 당당한 존재다. 그래서 자유로운 이다.
▲영화 < 가능한 사랑 > 스틸컷
넷플릭스
영화는 점만 찍을 뿐, 선을 잇는 건 관객이다
두 사람의 유영을 무엇이라 볼 것인지는 온전히 영화를 보는 이에게 맡겨져 있다. 이 영화의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치밀하게 계산된 이창동 감독의 너그러운 내어줌이 보는 이로 하여금 여백을 채우고픈 충동을 갖도록 한다. 관객은 감독이 물러난 꼭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더 많이 판단하고 심지어 결정지으려 들 테다.
이를테면 상우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 할아버지가 일제시절 순사를 했다는 것, 그 소장품이던 호루라기를 마치 박물관에 놓듯 가지고 있다는 점, 회사 일에는 개입하지 않고 투자자로 산다는 그가 수시로 미국의 누구와 통화하며 모종의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 호석이 다니던 사모펀드 소유 중공업의 손바뀜이 상우의 작업이 끝난 시점과 맞물려 확정된다는 것 등이 하나하나 단서가 되어주는 듯하다.
상우는 친일파 후예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자본주의 첨병이 되어 돈이 돈을 낳는 구조에서 거듭 승전보를 올리는 악독하거나, 적어도 무정한 자본가일까. 그렇게 보도록 하는 힘이 영화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그 마음을 돌아볼 심력이 있는 이만이 한 걸음 떨어져 감독이 놓아둔 여백과 그 효과를 대하게 된다.
상우는 어릴 적부터 집에 반감을 가져온 사람이고, 미국에 유학했을 당시엔 태권도장이나 차리고 살까 했을 만큼 겉돌기도 했다. 어쩌면 가진 것 없고 급도 맞지 않는 예지와 결혼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을지 모른다.
가문의 자산을 물려받아 어른처럼 행세하지만,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이 해변으로 돌아올 때에야 비로소 자유롭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대도 보름달처럼 충만한 자유다. 그러나 누군가 그를 얼마간이라도 이해해준다면 훨씬 덜 외로울 텐데.
▲영화 < 가능한 사랑 > 포스터넷플릭스
당신의 이해는 진실한가? 정말로?
먼저 손 내밀어 악수할 줄 알고, 옛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반가워할 줄 알며, 늦된 아이를 사려 깊게 가르치고, 누구의 실수며 무례 앞에서도 한바탕 웃어넘길 줄 아는, 해야 할 말을 재지 않고 하고, 풀려 있는 신발끈을 꿇어앉아 묶어줄 수 있는 사내, 그를 쉽게 오해하는 이가 과연 누구인가.
악질적 사모펀드로부터 끝없는 구조조정의 굴레에 빠진 기업을 해체와 기술 유출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는 모습을 세상은 아주 드물게만 보여주었다. 맑시즘의 가르침과 달리 노동자의 단결이며 옥쇄에의 각오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란 걸 이제는 모두가 안다.
체제 아래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충실한 자본의 유입 없이는 탈출을 이룰 수 없다. 그렇다면, 어쩌면, 쉽게 쉬운 방향으로 뻗치려는 성급한 판단을 경계해 마땅한 일이다.
<가능한 사랑>은 정말이지 이루어져야만 하는 가능한 사랑을 말한다. 급속히 밀려드는 자본과 기술의 문제적 동맹과 침탈 앞에서 노동은 사라질 것이 되어가고, 사랑은 불가한 것으로 전락해가는 듯하다.
저항을 위한 연대는 오로지 같은 달을 올려다보는 이들 사이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일, 이대로는 안 된다고 호각을 불고 귀를 기울이며 부끄럽지 않게 유영할 수 있는 사람이 그래서 귀하다.
좀처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창동이 말하는 사랑은 그 너머에 있는 듯도 하다. 날 수 없는 과자 봉지가 훨훨 날아서 보름달처럼 뜰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 사랑도 가능할 수 있을까.
방해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너는 이렇고, 너는 저렇다고 선을 긋고 편을 가르며, 내 선 땅은 옮기지 않은 채로 남 선 곳만 탓하는 태도가 사랑을 막는다. 가능한 사랑을 불가능한 사랑으로 바꾼다. 있어 마땅한 자유를, 어울림을 훼방한다.
그 가로막음이 바로 내 안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확인하게끔 한다. 끝내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유약한 태도조차도 영화는 끝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콘칲 봉지도 어쩌면 세상을 훨훨 날 수 있다. 가능하다. 가능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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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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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와 헐거운 반지, 두 부부의 위태로운 줄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