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뒤늦게 만난 아버지의 시간

[인터뷰] 꿈밭시즌 신작 <쌀알의 노래> 이시원 작가·연출


쌀을 씻던 은정의 손에서 쌀 한 톨이 떨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던 작은 쌀알은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으로 은정을 데려간다. 어린 시절 은정이 쌀을 씻다가 쌀알을 흘렸을 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다시 바가지에 담았다. 별것 아닌 듯했던 장면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억에 남았다.

오는 10월 2일부터 4일까지 아르코꿈밭극장에서 공연하는 명작옥수수밭의 신작 <쌀알의 노래>는 그 기억에서 출발한다. 현재의 주방에서 과거의 논으로 들어간 은정은 어느 순간 볍씨가 되고, 아버지의 손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물을 머금어 싹을 틔우고 모판에서 자란 뒤 논으로 옮겨진다. 가뭄과 뜨거운 햇볕을 견디고 폭우와 태풍도 만난다. 벼 한 포기가 되어 한 계절을 살아가면서 은정은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이시원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지난 21일 대학로에서 만난 그는 이 작품과 관련된 배경을 이렇게 기억했다.
 이시원 연출가 프로필
▲이시원 연출가 프로필이시원 제공

"어린 시절 제 기억 속 부모님은 늘 논과 밭에서 일하고 계셨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평생 일하셨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한 아이의 부모가 되고 나니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질문은 익숙했던 부모의 노동을 다시 보게 했다. 논과 밭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히 농작물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시원은 흔히 사용하는 '자식농사'라는 말에서도 작품의 실마리를 찾았다. 씨앗 하나를 심어 오랫동안 돌보고 키워내는 농사의 과정과 부모가 한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한 톨의 쌀은 아버지의 삶과 딸의 성장,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을 연결하는 매개가 됐다.

"자라라, 살아라, 되어라"… 한 톨의 쌀이 살아낸 시간

 쌀알의 노래 공연 장면
▲쌀알의 노래 공연 장면명작옥수수밭

작품에는 세 번의 노래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자라라, 자라라, 자라나라', 이어 '살아라, 살아라, 살아가라', 마지막에는 '되어라, 되어라, 되어가라'로 변한다.

볍씨가 싹을 틔우고 벼가 되고, 마침내 한 톨의 쌀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동시에 한 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세상을 견디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잘 자라라. 잘 살아가라. 그리고 마침내 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가 은정에게 평생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품은 아버지를 처음부터 이해해야 할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어린 은정에게 아버지는 서운한 사람이다. 함께 놀아주기보다 늘 논으로 나가고, 비가 오면 자신보다 논부터 걱정한다. 씨름을 가르쳐주겠다는 약속도 농사일 때문에 미뤄진다. 이시원은 어린 은정의 서운함 역시 그대로 두고 싶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은정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리가 달라진 거예요."

시간이 지난 뒤 은정의 눈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은 아버지의 행동이다. 물을 대고,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비바람에 쓰러진 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몸이다.

'너를 위해 이렇게 살았다'는 설명 대신 묵묵히 이어온 행동으로 인물을 보여준다. 이시원이 작품을 만들며 중요하게 여긴 것도 '사랑을 설명하지 않고 사랑이었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족의 관계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담으려 한 이유다.

농부의 몸짓이 춤이 되고, 논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

 쌀알의노래 공연 장면
▲쌀알의노래 공연 장면명작옥수수밭

무대 위의 논은 벼만 자라는 곳이 아니다. 개구리와 우렁이, 물방개, 소금쟁이, 논지렁이, 잠자리 등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작은 세계다. 은정은 이들과 함께 계절을 지나며 벼의 한살이를 경험한다.

농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농부의 몸짓과 농사의 리듬을 공연의 언어로 바꾼 것도 특징이다.

모내기와 김매기, 물꼬 트기, 수확과 타작까지 반복되는 노동의 움직임이 배우들의 몸짓과 장단으로 변한다. 왈츠와 펑크 등 서로 다른 리듬이 등장하고, 벼가 자라고 계절이 변하면서 무대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이시원이 특히 눈여겨봐 달라고 꼽은 것은 폭우 장면이다.

폭우에 떠내려가는 은정을 아버지가 붙잡아 다시 땅에 심는다. 겉으로 보면 농부가 벼 한 포기를 살려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은정에게는 자신보다 늘 논을 먼저 생각한다고 여겼던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아주는 순간이 된다.

아버지는 뿌리를 내리고, 발바닥을 땅에 붙이고, 흔들려도 버티라고 말한다. 벼에게 하는 농부의 말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살아갈 딸에게 건네는 말이다. 농사와 가족의 이야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겹치는 순간이다.

<쌀알의 노래>는 아이와 어른이 같은 무대를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갑자기 볍씨가 되어 과거의 논으로 들어가 여러 생명을 만나고, 가뭄과 비바람을 견디며 쌀이 되는 모험이다.

반면 어른은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부모를 떠올릴 수 있다. 어린 은정의 서운함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짚거나, 지금 자신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겹쳐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시원의 딸도 공연을 본 뒤 물었다.

"저렇게 반항기 가득한 은정이 엄마였어?"

이시원은 "많은 부분 그렇다"고 답하며 함께 웃었다. 자신도 어린 시절 많이 흔들렸고 부모에게 붙잡히며 자랐다는 이야기도 딸에게 들려줬다.

공연 한 편이 엄마의 어린 시절을 딸에게 보여준 셈이다. 이시원이 공연을 본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질문도 그 연장선에 있다.

'우리 집에서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중에, 지나고 보니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매일 차려지는 밥일 수도 있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 빨래와 청소, 매일 일터로 향하는 뒷모습일 수도 있다. 한 톨의 쌀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공연장을 나선 뒤 식탁에서 계속된다면 어떨까.

"엄마 아빠는 어렸을 때 어땠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

그런 질문을 나누며 다시 밥 한 그릇을 바라보는 순간, 평범했던 쌀 한 톨도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한 계절의 햇빛과 비, 흙과 물, 그리고 그것을 길러낸 사람의 시간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연극 쌀알의 노래 공식 포스터
▲연극 쌀알의 노래 공식 포스터명작옥수수밭

덧붙이는 글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가족극 〈쌀알의 노래〉는 10월 2일부터 4일까지 아르코꿈밭극장에서 공연한다. 이시원이 작·연출하고 조하영이 안무를 맡았다. 공연은 65분이며 만 4세(2021년생) 이상 관람할 수 있다. 티켓은 전석 3만 원이다.
연극 쌀알의노래 명작옥수수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3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월간지 <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 한겨레신문 객원 필진(2016~2023)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전한다. 이밖에 문화예술 전문매체인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에 문화예술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