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철들 무렵> 스틸컷
인디스토리
가족 구성원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담보할 수 있을까
철택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건강할 때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말기 암 투병이 시작된 지금은 다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려면 돌봄이 필요하고, 이는 오롯이 딸 정미의 몫이 된다.
문제는 정미의 삶도 여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무명 배우인 그는 아직 자신의 삶을 완성하지 못했다. 오디션에 참여하고 촬영장에 나가는 일은 생계를 위한 활동이기도 하지만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쌓아가기 위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아버지의 투병이 시작되면서 정미의 시간은 간병과 생계, 연기 활동 사이에서 찢어지기 시작한다. 병원에 머무르면 배우로서 기회를 잃고, 일과 미래를 선택하면 아버지를 충분히 돌볼 수 없다.
현숙 역시 다르지 않다. 20년이 넘게 남편과 별거해 온 그는 은퇴 후 비로소 홀로 살아갈 시간을 얻었지만, 가족들은 그 독립을 온전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형제들은 혼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 옥남을 모시고 살라고 요구하고, 정미는 아버지의 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청해온다.
정미가 이제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 인물이라면, 현숙은 이제 자신의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한 두 사람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자신의 시간을 먼저 요구해 온다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 요구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가족을 돌보지 않겠다는 선택에는 책임을 외면한다는 윤리적, 도의적 비난과 죄책감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의 갈등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회복하길 바라지만 자신의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정미와 가족의 어려움을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온 노후를 다시 다른 사람의 돌봄에 사용하고 싶지 않은 현숙. 모두에게 독립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오랫동안 얽혀온 시간과 관계, 잘라내려야 잘라낼 수 없는 인정에서부터 영화의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돌봄의 책임은 왜 가족의 몫으로 남겨지는 것일까.
철택의 치료를 둘러싼 갈등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변변한 재산 없이 노동을 이어온 그는 자신의 치료비를 충분히 감당하기 어렵고, 정미 역시 생계와 간병을 병행해야 하는 처지다. 결국 정미는 오랫동안 별거해 온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가족을 다시 하나의 책임 공동체로 묶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효도 계약서는 그동안 가족의 도리라는 이름으로 여겨졌던 책임을 구체적으로 나누어야 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서로를 향한 애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비용과 노동의 문제를 영화가 인정하는 대목이다.
물론 정미에게 자식으로서의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거나 현숙에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라고 설득함으로써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가족 내부의 갈등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독립을 주장한다면 철택에게 필요한 돌봄은 누가 제공해야 할까.
간병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을 분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충분히 마련된 세상이라면, 다른 가족 구성원을 딜레마에 몰아넣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누구도 자신의 삶 전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돌볼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철들 무렵> 스틸컷인디스토리
'철이 든다'는 것은 누구의 삶도 대신 결정하지 않는 일.
이 갈등의 지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은 의외로 옥남이 된다. 자녀들은 구순을 맞이한 그의 남은 생을 누가 책임질 것인지 논의하지만, 정작 옥남은 구순 잔치 이후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의 미래를 홀로 생각하고 싶다고 말한다. 당연히 부양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인물이 스스로 살아갈 시간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정미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미래가 있고, 현숙에게 이제야 누릴 수 있게 된 노후가 있다면, 아흔을 앞둔 옥남에게도 스스로 결정하고 싶은 내일이 남아 있다. 감독은 이 구조를 통해 나이나 역할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결정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영화가 타이틀로 삼고 있는 '철들 무렵'의 의미는 그래서 조금 다르게 여겨지는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철이 든다'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보다 공공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면모를 의미한다. 그 기준을 따르자면, 정미는 배우의 꿈보다 아버지의 간병을 우선해야 하고, 현숙은 노후를 포기하고 남편과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 옥남 역시 자녀들이 결정한 삶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의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니까.
그러나 그 선택이 모두에게 건강하지는 않다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정승오 감독은 서로의 삶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미래까지 결정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어쩌면 철이 든다는 것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삶이 자신의 삶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필요한 책임을 나누는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여전히 다투고 서로를 원망할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을 없애기 위해 누군가 자신의 삶을 일방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그 갈등을 감당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서로에게 필요한 시간을 내어주면서도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삶과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더 '철들 무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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